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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소설/파리와 런던의 빈털터리

파리와 런던의 빈털터리 IV -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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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10 파운드의 가치는 될 것이라 생각했다,(전당포에서는 대부분 사분의 일 가격을 예상한다) 이에 사분의 일은 250 또는 300 프랑 정도였다. 걱정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200 프랑은 예상하고 있었다


마침내 점원이 내 번호를 불렀다: '97 번!'


'네'. 라고 말하며 일어섰다. 


'70 프랑?'


10파운드 가치의 옷에 70 프랑이라니! 하지만 반박 해도 소용없었다; 반박하려는 사람을 본적이 있다, 점원은 저당금을 바로 거절해 버렸다. 돈과 저당표를 들고 나왔다. 이제 외투안에-팔꿈치가 심하게 헤진- 입고 있는 옷 외에는 ,담보 잡힐 만한, 여분의 셔츠 한장이 있었다. 후에, 이미 늦었지만, 전당포에는 오후에 가는게 현명하다는 것을 배웠다. 점원들은 프랑스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듯, 점심을 먹기 전까지는 기분이 언짢아 있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마담 F는 비스트로1)의 바닥을 쓸고 있었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와 나를 만났다. 내 방세를 걱정하고 있음을 그녀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저,'그녀가 말했다, '옷으로 얼마나 받았어요?'얼마 안되겠지?응?'


'200프랑 입니다,' 바로 말했다.


'오!' 놀란 그녀가 말했다; '그거 나쁘지 않네. 분명 비싼 영국 옷들 이었나 보네!' 


거짓말은 많은 문제를 피할수 있게 해줬는데, 기이하게도. 사실이 되어버렸다. 며 칠 뒤 뉴스기사 덕분에 정확히 200 프랑을 받게 되었다, 쓰리긴 했지만, 그것에서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방세를 냈다. 다음 주에 굶게 될 처지였지만, 지붕이 없는 신세는 안 됐다.


이제는 진짜로 일을 찾아야 될 때가 되었다, 친구 중 한 명이 기억이 났다, 보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웨이터였는데, 나를 도와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 병원의 병동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그는 그곳에서 왼쪽다리의 관절염을 치료 받고 있었다. 그는 내가 곤란한 상황에 있을 때 찾아오라고 말 했었다. 




보리스에 대해 말해 둬야 할 것이 있다, 기묘한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오랫동안 나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35세 정도의 덩치 큰 군인스러운 남자였다, 그리고 잘 생긴 외모였었다, 하지만 그의 병 이후로, 침대에 누워 있으며 엄청나게 살이 쪄버렸다. 다른 러시아 망명자들 처럼, 그는 흥미로운 인생을 살았다. 그의 부모는, 혁명 중 살해당한, 부자였었다.그리고 그는 제 2 시베리아 소총연대에 복무하며 전쟁을 치뤘다, 그에 말에 따르면, 러시아 군대에서 최고의 연대라고 했다. 전쟁 이후 처음으로 빗자루 공장에서 일을 했고, 하예스에서 짐꾼이 되었고, 접시딱기가 되었으며, 결국 웨이터로 승진했다. 그가 병 저 누웠을 때는 호텔 스크라이브에 있었는데, 하루에 팁으로 100프랑을 받았다. 그의 야망은 호텔의 책임자가 되어, 몇 천 프랑을 모으고, 라이트 뱅크 거리에서 작지만, 고급의 식당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보리스는 전쟁에 대해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언제나 말했었다. 군생활과 전쟁은 그의 열정이었다; 그는 셀 수 없을 만큼 전략과 전쟁사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는 나폴레옹, 쿠투조프, 클라우세비츠, 몰케 그리고 포흐에 관한 이론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카페는 몽파나르세에 있는 글로세리 데 릴라스 였는데, 단순히 네이 원수의 동상이 밖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후 에, 보리스와 나는 커머스 거리에 종종 함께 가고는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는, 커머스 역 대신에 캄브론역에서 내렸다, 커머스역이 더 가깝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캄브론 장군과 관련된 것들을 좋아했다, 장군은 워털루에서 항복을 요구 받았고, 그저 '제기랄!' 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혁명이 오직 그에게 남긴건, 훈장들과 그의 연대 사진들 뿐이었다, 그의 모든 다른 물건들이 전당포로 향했을 때 이것들은 지니고 있었다. 거의 매일 그는 사진들을 침대위에 흩뿌려 놓고는 그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보게, 나의 친구. 맨 앞줄에 있는 내가 보이지, 괜찮은 남자야, 그렇지? 새앙쥐 같은 프랑스 놈들이랑은 다르지. 20 살에 대위라- 나쁘지 않아, 하? 그래, 제 2 시베리안 보병 연대의 대위; 내 아버지는 대령이셨지. 



'아, 그렇지만 말이야, 친구, 인생의 기복이란! 러시아 군대의 대위, 그런 뒤, 푸! 혁명-한 푼 없이 사라져버렸지. 1916년에는 호텔 에두아루드 셉에 머물렀지; 1920년에는 거기서 야간 경비원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며 있었네. 경비원, 창고지기, 바닥청소부, 접시딱기, 짐꾼, 화장실 청소부로 지냈네. 웨이터에게 팁을 주다가, 웨이터에게 팁을 받게 됐네




'아, 하지만 나는 신사로 산다는게 어떤건지 알고 있지, 친구, 자랑하려고 말하는건 아니지만, 하루는 내 인생에 몇 명의 연인이 있었나 계산해 보려고 했다네, 200 이상과 사랑을 나눴더군. 그래, 최소 200명 이야 ... 아, 그래, 언젠간 돌아 올꺼야, '승리는 끝까지 싸운 사람의 것이야. 용기 말일세! 이런 식이었다.



보리스는 기묘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는 언제나 군대로 돌아가길 바랬다, 하지만 역시 웨이터의 모양새를 얻을만큼 충분히 오래 웨이터로 지내왔다. 그는 단 한 번도 몇 천 프랑 이상을 모아 본 적이 없지만, 그가 결국엔 식당을 시작하고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당연히 믿고 있었다. 모든 웨이터들은, 후에 알게 된거지만, 이런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그들을 웨이터로 지내는 것을 받아들수 있게 해줬다. 보리스는 호텔의 삶에 대해 흥미지게 이야기 하고는 했었다. 



'기다림은 도박이야.'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빈곤하게 죽던가, 일 년안에 부를 만들수 있지. 월급을 받지 않아, 팁을 믿어야 돼- 계산서의 십퍼센트, 샴페인 코르크 마개마다 얻는 와인 회사의 수수료 말일세. 가끔은 팁이 엄청나게 대단하지. 맥심의 바텐더 같은 경우, 하루에 500 프랑을 벌었어, 한 창때는 말이야 ... 나는 하루에 200 프랑을 벌어봤지. 비아리츠 호텔 이었어, 한 창 때 말이야. 전체 직원, 관리인부터 말단직원2)(PLONGEURS)까지 하루에 21시간을 일했어, 21 시간을 일하고 두시간 반은 침대에 누웠지, 한 달동안 계속 됐어. 그래도, 할 만한 가치가 있었지, 하루에 200 프랑 이라면.                 



 1) BISTRO - 이전까지는 작은식당으로 번역

 2) PLONGEURS 프랑스어, 잠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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