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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인문사회

대식민지의 시대를 연 잔인한 사업가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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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상인이었다.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듯, 당시의 세상은 지구평면설을 부정하고 지구는 둥글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유럽의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에서 들어오는 고부가가 가치 상품들, 향신료와 비단 등을 수입하며 많은 부를 쌓았다. 하지만 세상사 쉽지 않다. 지중해 지역국가들의 거부들은 카르텔을 형성했고 수입품들의 물품은 비싸기 그지 없었다.

 

콜럼버스는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지구가 둥글다가 아니었다. 배를 타고 나가면 더 빠르게 인도에 도착 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자신과 투자자에게 돌려 줄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무모한 생각에 투자할 투자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 무모한 계획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그 정도의 돈을 댈 수 있는 거부는 국가, 곧 왕들 밖에 없었다. 

포트투갈,영국, 그리고 프랑스 왕들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돈도 돈이였지만 그가 계산한 항해일정은 왕가의 과학자들이 보았을 때 앞뒤가 맞지 않았다. 콜럼버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를 모르는 이 사업가는 결국 스페인 왕가를 설득해낸다. 스페인 왕실에서도 콜럼버스의 계획은 앞뒤가 맞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벨라 여왕은 그의 벤처사업에 도박을 걸기로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지중해 무역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특히 지중해와 관계가 없는 국가들은 큰 이득을 가져 갈 수 없었다. 그 때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국가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대서양, 대서양에는 한 방, 판도를 뒤엎을 수도 있을 한 방이 있어 보였다. 

 

르네상스가 지나며 유럽에는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했고 중산층, 부르주아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국가 재정이 더 필요했고 더 싼 가격에 인도와 중국의 물품을 들여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탈리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사치품들을 수입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어야 했다. 그런 시기에 성공이 기회를 잡은 상인이 바로 콜럼버스였고, 그는 스페인 여왕 이자벨라에게 인도와 중국 그리고 황금의 땅을 약속한다.  

 

왕족은 모든게 완벽한 투자자였다. 그에게 돈을 대줄 뿐만이 아니라 혹시 얻게 될지 모르는 땅이나 뱃길에 대한 권리를 보장까지 해 줄 수 있었다. 세 척의 배와 96명의 선원을 모집한 콜럼버스는 1492년 대서양을 횡단한다. 

 


 

카나리군도를 떠난지 세 달 여남짓 지난 10월 11일 또는 12일 밤 콜럼버스와 선원들의 눈 앞에 불빛이 아른거렸다. 다음 날 아침 이들은 배들을 정박하고 육지에 상륙한다. 세계사 역사에 남을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미 익히 알고 있듯이 그가 발견한 곳은 지금 캐리비안 해협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는 12년간 총 네 번 대서양을 횡단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찾은 그 곳이 유라시아 대륙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인도라고까지 이름 지었다. 

 

그 곳에 살던 원주민과 마주친 그날 콜럼버스는 8명의 원주민을 잡아 자신의 하인으로 삼는다. 콜럼버스가 원했던 향신료와 비단이 없었던 탓인지, 원주민들이 가진 화력이 약해서인지, 콜럼버스는 스페인 국왕이 허락한 권력으로 이들을 노예로 삼는다. 

 

금 채취를 강요했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 한 원주민은 손이 잘려 나가거나 목이 달아났다. 심지어는 죄 없는 신생아까지도 이 일당들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문제는 그 땅은 금이 나지 않는 땅이었다는 것이다. 금이 나지 않음에 그들은 그나마 돈이 될 법한 작물들을 원주민을 통해 농사짓게 했고 농작물을 스페인으로 보낸다.  

 

1700명이 콜럼버스에게 잡혀 유럽행 배에 몸을 싣는다 이 중 약 200명이 항해 중 목숨을 잃는다. 스페인에 살아 도착한 1500명은 노예로 팔려 나간다. 훗 날 원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유럽이 가졌단 병기를 당해 낼 수 가 없었다. 

 

포로로 잡힌 원주민들은 목이 달리거나 고문당하다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아이티섬에서만 250,000명이 죽었다. 그 중에는 신생아와 아이들에게도 독약을 먹고 동반 자살한 수 없이 많은 원주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복자들은 그들에게 악마를 넘는 존재들이었다. 

 


 

콜럼버스의 악행은 같은 스페인인들에게도 악명이 높았다. 1500년 손이 사슬에 묶인채 본국으로 소환된다. 식민지 총독으로서의 그의 지위는 없어졌다. 하지만 왕 퍼디낸드는 그를 풀어주고 네 번째 항해의 돈을 대준다. 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상인이자 벤처사업가였던 콜럼버스는 인생 말미에 공직도 잃고 명성도 크게 바란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그가 일궈낸 부는 자식에게 물려주었고, 그와 스페인 왕가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정산은 그의 자손들이 건 소송으로 300년간 이어지게 된다.  

 

이 이탈리아인은 1506년 눈을 감는다. 스페인에 묻혔던 그의 시신은 그의 아들이 캐리비언으로 옮긴다. 훗 날 그 지역을 점령한 프랑스인들이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쿠바로 옮긴다. 눈을 감고서도 대성양을 횡단 한 것이다. 악명 높았던 콜럼버스는 천수를 누리고 눈을 감았지만 남미의 악몽은 이제 시작이었다.

 

향신료와 비단은 없었지만 황금의 땅 엘도라도는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소위 정복자들이 물밀듯 한 탕을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스피냐드 정복자들은 남미의 제국들과 문명을 차근차근 정복했고 남미를 자신들의 발 아래 두게 된다. 1525년 전까지만 따져도 약 24,000에서 25,000 킬로그램의 금이 스페인으로 징발됐다. 

 

1660년 전까지 대략 164,000 킬로그램의 금이 남미를 떠나 스페인으로 옮겨갔다. 유럽 변방에서 자신들의 땅을 차지하고 있던 무슬림을 간신히 물려쳐낸 스페인이, 무적함대로 유럽을 호령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동로마가 오스만 투르크에의해 멸망. 오스만 투르크는 지속적으로 서방으로 진출하려 함. 무역로가 예전같지 않음. 포르투갈은 1498 인도항로 개통.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스페인 출신으로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이 포르투갈의 소유라는 포르투갈 국왕의 주장을 무시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미 대륙을 좌우로 나누는 협약을 맺고 서로 침공하지 않기로 함. 콘퀴시타도르, 코르테즈. 아즈텍 공격. 첫 공격 실패. 주변 아즈텍에 적대적 부족 규합. 이외에도 잉카 등을 두고 스패인 침략자들은 서로 싸움. 프란시스코 바스케즈, 멕시코를 뉴스페인으로 명명, 미서부 지방을 점령. 그랜드 캐년을 발견. 

 

1600년대부터 남미로부터 금이 스페인 유입. 인플래이션 등 사회적 문제 있었으나 거대한 부가 쌓이기 시작함. 황금의 시대라 불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는 스페인을 지속적으로 지원함. 문화 경제가 속도가 급속도로 발전 팽창함. 이탈리아, 제노아는 상업으로 망하고 있었지만, 스페인의 해외무역 전쟁자금을 은행으로서 지원함.

15세기 발틱해안의 무역이 폭발하기 시작함. 독일의 상업동맹인 한자동맹은 발틱 무역을 쥐고 있었음. 1580년이 되면서 네덜란드에서 새로운 배를 만들기 시작함. 대양 항해에 특화된 신기술로 배를 건조.  

 

https://www.youtube.com/watch?v=7J_fIWsf9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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