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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인문사회

인종차별 속에서도 사랑을 실천한 LA의 한국인 천사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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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시대였다. 직업이 없었고, 대부분이 가난에 허덕였다. 그런 시기에 파독 간호사는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독간호사의 일도 만만치 않았다. 대부분이 몸을 가누지 못 하는 노인들의 병수발이나 차가운 시체를 닦는 일이 전부였다. 가난한 세상에서 온 간호사에게 부자의 나라도 마냥 쉬운 곳은 아니었다.

 

파독광부와 결혼을 한다. 몇 몇이 그랬듯 홍정복씨도 독일에 광부로 온 남편과 만나 평생을 약속한다. 이 둘이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선택한 곳은 미국이었다. 독일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한국은 미래를 꿈꾸기에는 힘든 곳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희망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이 곳에서도 꿈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아끼고 아껴 모은 돈으로 장사를 시작했지만 본전도 못 찾고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직장을 잃은 남편에게 도시락을 싸주며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해줘야 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기를 몇 번이었다. 

 

노력만 하면 최선만 다하면 얻을 수 있다던 아메리칸 드림은 광고 속 캐치프레이즈 같았다. 그럼에도 둘은 포기 하지 않았다. 홍정복씨는 미소와 친절을 잃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돈으로 차릴 수 있던 수퍼마켓은 빈민들이 주로 사는 지역에 있었다. 갖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이자 최선의 노력이었다. 인근 한인 마켓에서 강도가 들었다는 소식도 몇 번이나 들렸다. 그럼에도 홍정복씨는 친절을 베풀고 이웃들에게 인색하지 않았다.

 

혼자서 마트를 돌아보는 손님의 뒤를 쫓지 않았다. 분유과 기저귀 값이 모자란 젊은 엄마에게 분유와 기저귀를 더 올려주며 다음에 갚으라고, 웃으며 돌려 보냈다. 음식을 훔쳐 달아나는 소년에게는 넘어지지 말라며 소리쳐 주었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을 고객이 아닌 이웃으로 대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홍정복씨를 마마라 불렀다.  

 

남편이 써 놓은 가격표는 홍정복씨가 고쳤다. 1전이라도 가격을 낮췄다. 남편과 싸우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고치지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만 남겨도 된다. 1전이라도 남겼으면 되는거다. 홍정복씨는 힘든 상황에서도 남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고 친구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하늘도 무심한 일을 겪게 한다. LA폭동도 견딘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화마가 휩쓸고 한인타운이 약탈 당할 때도 무사했었다. LA폭동이 지난 7년 뒤 정체 모를 무장강도들의 총격에 LA의 천사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슬픔만 남기고 하늘로 떠나게 된다. 

 

그녀의 장례에는 지역의 이웃이자 친구들이 모여 마지막 길을 함께 해준다. 피부색깔에 관계없이 그녀를 마마로 불렀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천사의 승천을 함께 해 주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_4OjNOiO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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