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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인문사회

오드리 햅번의 비밀스러운 스파이 생활 – 나치에 대항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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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대의 아이콘 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오드리 햅번을 꼽는다. 하지만 오드리 햅번의 전기를 읽어 사람이라면 것이다. 그녀가 단순히 유명배우로만 알려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2차세계대전 , 햅번은 네덜란드로 이사가게 된다. 오드리 햅번의 부모님은 네덜란드는 중립국이기에 전쟁의 화마로부터 가족이 안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나치가 식량 공급을 끊었고 얼마안가 오드리 햅번은 기아상태에 걸려 영양실조가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치의 공포 앞에 질린 사람들을 위해 발레 공연을 해주기도 한다. 나치는 이런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탐탁치 않아했고 언제든 잡아 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치의 눈을 피해 사람들을 위해 공연하는 단체를 검은 저녁이라 불렀다. 공연장의 창문을 가려 나치의 눈을 피해 공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오드리 햅번은 네덜란드의 레지스탕스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오드리 햅번과 같이 네덜란드에 돈을 대준 사람들이 여럿 존재했다. 돈은 레지스탕스 운영비와 유대인을 살리는데 쓰였다.

최고의 관객은 발레가 끝날 때까지 숨소리 내지 않은 분들 이었어요.”

나치가 무서워 박수 제대로 없는 공연을 위험을 무릅쓰고 보러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돈은 레지스탕스에게 들어갔기에 여전히 햅번의 상태는 말라 있었고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10 소녀의 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말라있었기에 춤을 춘다는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

그리고 교외까지 진격한 미국군과 영국군에게 달려가 정보를 전달하고 음식을 구해 오는 일을 맡았다. 15세의 일이다. 나치군의 눈을 피해 연합군의 연락책으로 활동을 것이다. 오드리 햅번은 때도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네덜란드에 주둔 중인 나치 경찰이 오드리 햅번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드리 햅번은 당황하지 않고 들판에 꽃을 따기 시작했다. 경찰이 다가와 통행증을 요구했고 햅번은 친절한 미소와 함께 당황하지 않고 통행증을 보여줬다.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고 나치 경찰을 대했고 나치 경찰은 그런 그녀를 보내주었다. 다른 10 소녀들이었다면 자리에서 죄를 졌다며 울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햅번은 레지스탕스에서 나오는 신문을 몰래 돌리기도 했다. 물론 나치에게 잡히면 바로 감옥으로 고문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오드리 햅번의 아들 루카에 의하면 햅번은 영국군을 집에 숨겨준 적도 있다고 한다.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굉장히 무섭고 위험한 일이었다고요. 하지만 군인은 이상한 군복을 입었지만 그래도 구원자였지. 나의 기사이자 영웅이었어.”

위의 모든 일들은 나치독일이 점령한 네덜란드에서 오드리 햅번이 10 행한 일들이다. 목숨을 걸고 나치에 대항한 10대를 보낸 소녀는 전세계적이자 전설적인 배우가 되었고 노년에는 아프리카에서 기아퇴치를 위한 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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