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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인문사회

기미가요에도 관대한 비정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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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어떤 노래를 국가로 삼던, 어떤 국가를 가지고 국가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을 고양하던지 우리나라사람들이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도 그들의 주권이 있고 자유가 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애국가를 두고 감놔라 배놔라 한다면 누가 이를 정상적인 행동이라고 하겠는가. 각 나라들은 정치,문화,역사,명분 등과 같은 추상적인 형태를 집약하여 자신들의 나라를 국가나 국기로 정의하고 표현할 수 있다. 무엇이 되었던, 이는 각 나라들의 고유권한이고 자유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특정한 나라의 특정한 국가나 국기가 타국에서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할 절대적인 이유도 없다. 


일본에서 기미가요와 일장기에 대한 거부로 선생들이 해고 된 일이 있었다. 일본내에서 일어난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가로서 자리를 잡은 기미가요다. 하지만 논란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기미가요라는 일본의 국가는 일본에 속한 오키나와에서도 환영받지 못 하고 있다. 한 때는 독립국가였던 오키나와에서는 사람들이 기미가요를 부르는 일을 지금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오키나와 뿐만이 아닌 일본 본토 내에서도 극우에 대척점에 서 있는 일본 사람들에게 조차도 불편한 논란으로 남아있는 있는 국가가 기미가요 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한국, 대만과 같은 곳에서는 어떻게 받아 들여질까. 지금 기미가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나는 기미가요를 들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기미가요라는 국가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일본 군국시절 한국인들에게 강제로 부르게 했다는 사실과, 일본의 제국시절을 대표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한국 땅에서 기미가요를 들을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을 정도로 기미가요라는 노래에 대해 무감각하게 살아왔다.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부를 사람도 없기에 들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 노래를 굳이 내가 찾아가며 들을 일은 더더욱 없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한국에는 매우 많았을 것이다, 막연히 기미가요에 대한 존재를 알고는 있어도, 전 인생을 통틀어 들어보지 못 한 사람들 말이다. 그만큼 기미가요는 한국에서는 민감한 노래이고, 금지곡에 해당하는 노래다. 두 번 말 할 필요, 설명의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기미가요는 한국에서는 울려선 안 될 이유가 너무 확연한 노래다. 





이번 비정상회담이라는 TV 쇼에서 기미가요를 사용했다고 한다. 게다가 처음도 아니라고 한다. 기미가요 사용에 대한 사과를 발빠르게 올렸다고는 한다. 그래, 실수였을 수 있다. 사람은 실수를 하고 사는 동물이니까. 완벽한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실수는 누구나 한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실수를 하고 산다. 게다가 한국 사람이 아닌가, 실수에 대해 관대하고 너그러운게 한국 사람들이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인간의 정으로, 사람의 온기로 실수를 감싸주고 보다듬어주고 따끔한 질타 한 번으로 용서하고 깔끔하게 잊어 준다. 한국인의 정이고, 한국인의 정서가 아니겠는가. 다수가 사람 한 명, 직장잃고 망가지는 상태까지 몰아 붙여야 만족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정서라면 말이다.


우리가 만들어 온 정서가 그렇다. 실수 할 수 있고, 사과 한 번으로 용서해주고 용인해주고 잊어주고 망각해 준다. 과거의 안 좋은 일은 빨리 지워버리는게 상책이고, 안 좋은 소리, 안 좋은 말은 빨리 하고 끝내는게 좋다. 사람이 한 번 실수 한 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건 사람된 도리로서 할 일이 아니다.  사람의 실수를 용인해주고 용서해주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이 베풀 수 있는 관용의 끝이라고 본다. 모두를 사랑하고 아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의 정은 세계에서 찬양받아야 할 만큼 인간이 인간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도리의 끝이다. 이번 문제도 그렇다 이렇게 한 번의 따금한 질타를 했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모두 같이 실수는 잊어주고 불편한 감정을 품고 어색한 시간을 이겨내면 자연스레 잊혀질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기미가요 한 번 틀었다고 우리나라가 망한 것도 아니고, 일본이 전쟁선포를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귀 한 번 버렸다고 치부하고 넘어가면 그만인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앞으로도 비정상회담을 볼 것이고, 물론 불편한 감정을 품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유익하고 재미난 프로그램을 안 볼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는 알 수가 없다. 한 번의 실수로 이 재미난 프로그램을 안 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저 재미난 프로그램은 재미난 프로그램으로 존재하면 그만이고, 볼 때만 즐거우면 그만인 것이다. 한 번의 실수로 비정상회담 전체를 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라며 TV 앞에 앉아 즐겁게 비정상회담이라는 쇼를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내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간다.   


말로는 질타를 햇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다. 말로는 질타를 하고 있지만 비정상회담의 시청률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같은 실수는 반복될 여지가 크다. 벌금이 존재하고, 감옥이 존재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물리적인 심판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않다면 이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비난도 그저 듣고 넘기면 그만이다. 한 번만 더 하면 그때는 안 봐야지라는 생각이, 그 다음의 실수에 대한 느슨함을 부를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렇게 한 번의 실수는 두 번의 실수가 되고, 실수는 더 이상 실수가 아닌 상식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이 TV쇼를 방송하는 방송국의 다음 실수를 제어는 확실한 충격요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자체적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다시는 실수를 안 하는 방법을 방송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할 수 있다. 소비자들은 그런 행동을 방송국이 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정은 이 TV쇼를 시청하는 소비자들의  손에 들려 있다고 본다.


 불과 한 두 세대 전에 존재했던 나치에 대해 가장 혹독하게 잊지 않은 나라가 있다. 그들은 과연 그네들의 나라에서 나치를 어떻게 지워냈고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을까. 사회는 한 명이 만들어가지 않는다. 미꾸라 한 마리가 맑은 물을 흐릴 수는 있다. 미꾸라지를 용서하고 계속해서 물을 흐리게 놔두고 방관할지 아니면 어떤 대처를 할 지는 그 물에 같이사는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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