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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소설/영어

시간의 흐름과 삶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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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하나의 거대한 부분으로서 작용 하고 있기도 하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강렬함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거부 할 수 없는 절대적 힘을 가진 그 무언가에 의해 결정 된 인간의 힘으로는 바꾸거나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운명을 비웃거나 전혀 믿지 않기도 한다. 인간의 삶 속에 운명의 영향이 얼마나 거대하고 대단한 것 인지를 가늠할 수는 없으나 실제로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면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누리기 위해 인간이 실제로 자신의 두 손에 거머쥘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운명이라는 단어 자체와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실제 뜻과 그 영향력의 비확실성에 비교하여 본다면 안타깝게도 운명이라는 것은 현재까지의 인간들이 가진 두뇌로서는 밝혀내기 쉽지 않은 일임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 글을 읽거나 이 글을 현재 쓰고 있는 사람의 운명조차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일수도 있으며 이러한 태고적부터 정해진 운명대로 행동하고 있다 할지라도 사실관계에 대한 질문을 증명 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을 해 본다면, 언제라고 말 할 수도 없는 순간부터 이미 각 개인의 삶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정해 져있고 그 정해진 운명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마냥 작동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운명이라는 실체의 진위를 밝혀 낼 수 있는 증거도 명확한 확인을 통해 증명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사실 운명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주요하게 생각을 하고 중요 관점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점은 바로 그 누구도 운명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인간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삶 앞에서 초라하고 무지한 존재로 느낀 인간들이  그들의 무력함을 변명하기 위해 만들어 낸 단어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해 할 수 없는 삶의 희노애락과 생노병사 앞에서 무력 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만들 어 낸 여러가지 설명 중에 하나가 운명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인데 여전히 운명이라는 이 단어를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거짓으로 인식해야 하는 지를 밝혀낼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선을 줄 수 밖에 없다.  인류가 지내 온 평생의 역사와 앞으로 나아갈 평생의 역사를 합쳐서 운명이라는 단어의 진진위 여부를밝혀내기 위한 연구를 진행 한다고 해도 실현 불가능 하지 않을까 한다. 삶에 대한 설명의 한 방편으로서 인간이 만들어 낸 단어에 불과한지 또는 실제로 인간의 삶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관찰하고 실제로 경험을 통해 운명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명명 한 것 인지를 밝히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 일 중 하나이다. 그렇다는 것은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없다 라는 토론과 논의 또한 운명의 존재 여부 조차 증명 할 수 없기에 사실상 무의미 한 일에 가까울 수 있다. 그 누구도 운명의 존재를 알 수도 증명 해 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태어나고 죽어가며 생기는 일련의 행동들이 이미 정해진 운명에 의해 진행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정해진 운명은 없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일련의 사건들이 뭉치고 사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연결이 되어 나타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면 과연 인간의 삶은 어떠 한 방식으로 생각이 되어져야 하며 운명 또는 정해지지 않은 운명 앞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하기 전에 다시 한번 운명과 인간의 삶에 대해 확실히 정의해야 할 것은 정해진 운명대로 각 개인의 삶이 진행이 되고 있던 무규칙적이고 무계획적인 삶을 인간이 누리고 있던지 간에 결국 인간은 자신의 삶이 어떻게 진행이 될 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대로 진행이 되고 있다고 할 지라도 인간은 정해진 내일을 알 수 없으며 운명이라는 틀에서 벗어 나있는 인간의 삶 덕분에 정해진 내일이 없다고 한다면 당연히 내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며, 운명이 정해져 있던 운명이라는 것이 허구 이던 간에 각 개인은 내일 정확히 어떠한 일을 마주칠지 어떠한 일이 그들에게 벌어질지 예상 할 수도 예측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인간이 예측 할 수 있으며 기대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흐른 다는 것이며 내일이 온다는 것이겠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걷지 못 하는 포유류 중에 하나이다. 탄생 시점부터 걸었다는 증거가 지난 역사를 통해 발견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 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통설이며 받아 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보통 인간이 태어나서 걷기까지는 1년 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1년이 지나면서 어린 아기는 걷기 시작하며 말을 하려 한다. 대부분의 아기들은 넘어짐과 일어남의 반복 적인 훈련을 약 1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반복을 한다. 1년이라는 시간만이 지났기에 가능 한 것이 아닌 아기가 1년 동안 일어섰다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걷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만약 아이가 부모의 강제로 인해 침대에만 누워 있거나 일어서고 걷는 법을 연습하지 못 했다면 1년 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이는 걷지 못 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흐르는 1년의 시간만이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아이가 걷기 위해선  걷기 위한 연습을 자각적으로던 무의식적으로던 1년 동안 하여야지만 걸을 수 있게 된다. 1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걷기 위한 시도와 노력이 없다면 아마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걷는 연습과 시도를 하지 못 한 아이는 그러한 시도와 연습을 한 아이들과는 다르게 1년이 지났어도 걷지 못 하는 단계에 남아있을 확률이 올라가게 된다. 수 많은 아이가 동시에 누리는 1년 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기 다른 행동을 통해 결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1년 이라는 시간 속에서 걷기 위한 시도와 노력을 통해 신체 건강한 아이가 걸음마를 땔 수 있을지 없을 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의심 할 수 없는 미래를 예측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아이에게 정해진 운명이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긴다. 아이가 1년을 무사히 넘겨 걷기 시작했다면 이 아이는 이미 걷기로 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아이가 1 년 간 노력을 하고 시도를 하였기에 정해지지 않는 불규칙적인 삶 속에서 얻어 낸 걷는 다는 하나의 성과를 올린 것일까.


정해진 운명이었던 아니었던 아이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는 부모에 의해 서던 자신 스스로던 걷는 연습을 하거나 시도하였을 것이며 그러한 결과로 아이는 걷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태어나서 걷게 되는 순간까지 일련의 과정을 운명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정해지지 않는 불규칙 속에서 노력으로만 얻어진 무엇 인가로 표현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는 걷는 노력과 시도를 약 1년 이라는 시간을 거쳐 해왔기에 걷게 된다는 성취를 얻어 냈다는 것이다. 정해진 운명이었던 아니었던 간에. 여전히 우리는 운명이 사람의 인생과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도 모를 뿐더러 실제로 운명이 존재하고 있는지 존재하지 않는 것 인지조차 증명 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운명이 정해져 있는지 정해져 있지 않은 지에 대해 고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해져 있는 운명 앞에서 건 불규칙적이고 혼란스런 삶 속에서 건 내일은 예측이 불가능 한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예측 할 수 없는 운명과 삶과는 달리 인간이 예측 할 수 있는 것은 연속적으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이던 자신의 운명을 따라가려는 의지를 지녔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바꾸는 것은 자연의 속성과 존재의 여부만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이 머무른 자리에서 음식 만을 섭취하고 잠만 자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삶을 사는 인간의 삶은 아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체적으로 변화하는 경험 만을 하게 될 것이다 갓 난 아이가 서기 위한 시도와 걷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육체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 한 것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진 사회라는 틀 속에서 원하는 사회적 지위를 얻는 다거나 사회적 명성을 얻는 다거나 원하는 만큼의 부를 쌓는 것은 쉽지 안타라는 것이 통설로 알려 져있다.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며 각 개인이 가진 능력 또는 정해진 운명에 의해 자신이 원하는 꿈과 목적을 성취 하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초점을 두고 생각 해야 할 것 중에 첫 번째는 그 누구도 내일을 예측 할 수 없으며 오늘의 행동이 내일의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오늘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을 확률이 변화 할 확률보다 더욱 크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행동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 만을 수동적으로 지켜 만 본다면 결국 또 다른 1년은 지나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결과를 얻기 위한 행동이 실제로 원하는 결과를 가져 올지 또는 꿈과 목적에 전혀 다가가지 못 하는 행동이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으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가 삶을 변화 시켜주기를 원하는 것은 더욱 비현실적 일 수 밖에 없다. 굳이 자신의 삶을 바꾼다는 것이 거창한 일이 될 필요는 없다. (개인에 따라 거창하다는 것의 범주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소소한 변화, 개인의 능력을 증대 시키기 위해선 자신의 행동에 변화를 주어야 하며 아이가 걷기 위해 연습과 노력을 하며 자신의 시간을 소비 했던 것과 같이 시간을 소비하고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밝혀 오고 있듯이 시간의 소비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용이 되어야 하며 자신을 만족 시킬 수 있는 일에 사용이 되어져야 한다.


내일은 예측 할 수 없으며 인간이 벌이는 행동의 결과를 완벽하게 예측하고 조종 하는 일은 불가능 하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것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투자하지 않는다면 정해진 운명 속에서 건 변화하는 혼란 속에서 건 얻을 수 있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통한  변화하였지만 변화하지 않은 삶 이라는 것이다. 실패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불쾌하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심지어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분명히 유쾌하지 않은 삶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실패라는 것의 범주 또한 인간이 정하고 있는 것이기에 실패라는 것의 범주 또한 각 개인에 따라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실패가 누군가에게는 성공 일 수 있으며 누군가의 성공은 누군가에게는 실패로 다가 올 수 있다. 실패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그 범주에 대해 고민 해 보는 것도 좋지만 그 보다 선행이 되어야 할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실제로 무엇 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 해 보거나 자신이 실제로 하고 싶거나 적어도 해보고 싶었던 일이 무엇 인지에 대해 먼저 고민하는 것이 조금 더 바람직 해 보인다. 인간은 자신의 삶이 시작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을 시작하게 되어있으며 그렇게 시작 된 삶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또는 태어나면서 자신의 부모를,국가를, 모국어를, 환경을 정하는 사람은 없다. 환경에 의해 인간은 길러지고 변화하며 그 안에서 반응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만약 각 개인 스스로가 자신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처한 삶의 일부분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면 적어도 무언가가 변하지 않을까 한다. 변한다는 것 변화를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일구기 힘든 일들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적어도 변화를 얻기 위한 시도라도 하지 않는다면 1년은 지나 갈 것이며 또 다른 1 년이 찾아 올 것이며 그 뒤를 쫓아 또 다시 1 년이 지나 갈 것이다. 운명과 비운명, 존재의 여부를 밝힐 수도 증명 할 수도 없는 이 둘 사이에서 고민을 하기 보단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느 개인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인간의 행동으로 인해 시간의 변화가 육체적 변화 이외에도 다른 변화를 가져 올 확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민하고 생각 해 보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을까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행동을 하는 것에 주안을 두고 자신이 변화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소비한다면 아이가 걸음마를 배워 나가듯이 분명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확률이 활동하거나 행동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욱 커지지 않을까 한다. 변화하는 것을 원한다면 자신의 시간 소비의 목적을 결과 보다는 무엇에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중점을 맞춰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적어도 행동이 없다면 시간이 흐름에도 육체적 변화 외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확률이 더욱 크다는 것은 아마 운명(존재한다면)보다 더욱 확실하고 확연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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