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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정치

항쟁과 혁명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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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항쟁과 반란은 인간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 왔다. 항쟁과 반란에 대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었으며 역사로 기록이 되었다. 항쟁이나 반란이 일어 났을 당시의 평가는 후 에 시간이 흘러 평가와는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다. 항쟁이 일어 났을 때의 시대상에 따라 반란으로 치부가 되었을 수도 있으며 국가를 전복하려는 무리들 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역사가들과 민중들 사이에서 항쟁은 반란이라는 억지로 씌어진 틀을 벗을 수 있었고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항쟁과 혁명이 일어났던 이유 중에 하나는 대다수의 민중과 국민이 고난과 역경에 빠져 있음에도 국가가 해결 해 주지 못 하였을 때다. 무능력 한 정부였거나 국민의 권리를 무시하고 국민을 탄압 하여 사회에 불공정과 불공평이 팽배 했을 때 일어났다. 

스파르타쿠스 

기원전 73년에서 71년까지 일어난 공화로마시대의 노예의 난이다. 로마군에 노예로 잡힌 스파르타쿠스는 공화정 로마로 이송되어 노예로 팔리게 되고 검투사가 된다. 노예의 신분이 아니었던 스파르타쿠스는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자신의 삶은 인정하지 못 하고 70명의 노예와 함께 탈출한다. 후 에 스파르타쿠스의 주변으로 몰려든 평민, 노예들과 함께 로마 남부를 점령까지 하게 된다. 그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군대로 로마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며 2년 동안 로마 남부를 지배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당시 로마 공화정의 토지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대다수의 몰락 농민이 가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공평하고 공정하지 못 했던 토지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살 터전을 잃고 착취 당해야 했던 몰락 농민들의 반란으로 낙인 찍힌 스파르타쿠스를 지지 했다는 것 이다. 


만적의 난 

고려시대 노비였던 만적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우리도 때가 오면 왕이 될 수 있고 장상이 될 수 있다." 라는 기치를 내걸고 사노비들과 반란을 계획한다. 핏줄을 근간으로 한 계급제도는 같은 인간 내에서 계급을 만들고 인간이 다른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을 허락했다. 사람 위에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 이다. 지금은 노비나 노예가 당연하다면 미친 사람 소리를 듣지만 당시에는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논리였으며 사상이었다. 1198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전에도 인간은 자유를 꿈꿔왔지만 당시 지배층들은 노비가 인간으로서 대우 받는 다는 것은 미친 소리라 하며 무시해 버렸다.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곳에서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노예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반란을 계획하고 일으키려했다. 지금 상식으로 본다면 어느 쪽이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 당시 지식인 중에도 만적의 뜻을 이해하고 속으로는 동의를 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거대한 사회가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동물보다 못 한 취급 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과연 지금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만적의 난은 그저 노비 한 명이 헛소리를 하며 꿈 꿔 왔던 국가 전복인가 하나의 혁명이 될 뻔 했던 사건인가. 

미국독립혁명 

1775년부터 1783년 까지 미국의 식민지 였던 13개의 주가 대영제국을 상대로 일으 킨 독립운동이다. 대영제국의 왕 아래 복속되어 있던 13개의 미국의 주들은 불합리한 영국의 정책 결정으로 인해 불만을 품게 되었고 자신들의 권리가 무시 되었다고 느꼈다. 당시 영국 아래 있던 미국의 식민지들 또한 영국의 정치 체제인 귀족정에 아래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독립을 이끈 건국 지도자들은 영국의 부패와 불합리한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영국이 미국에게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항해법을 강화 시키자 미국은 영국을 상대로 봉기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미국 내에 영국의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가 30% 나 존재하고 있었으며 법적으로는 미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영국의 시민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국인으로서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 했고 적절하지 못 한 처우를 받고 있었다. 미국은 대표자를 선출 할 권리는 없었지만 영국에 세금을 지불 해야 되는 처지가 되자 그들의 권리를 요구 했다. 하지만 영국은 미국인들의 정당한 권리에 대한 요구를 들어 주는 대신 군대를 파견 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입장에선 엄연한 반란이었으며 국가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한 혁명으로 인식했다.

프랑스대혁명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서 부르주아가 일으 킨 혁명이다. 당시 프랑스는 많은 전쟁에 관련하며 국가재정이 파탄 위기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 왕 루이 16세의 정부는 민중을 위한 정책이 아닌 귀족만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었다. 귀족들에게는 세금을 면제 했으며 국민들을 대변하는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탄압하고 억압하려 했다. 당시 국민들이 루이 16세에게 요청한 정책 개정에 대해 루이 16세와 기득권층이었던 귀족들은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귀족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협상이 오고 가고 있는 도중 왕당파가 지방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국민의회를 탄압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파리의 시민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봉기 하였다. 국민들이 요구한 것은 공정하고 공평한 정부의 정책이었고 피폐해진 민생을 위한 올바른 경제 정책을 내놓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당파는 협상 대신 무력을 사용하여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무력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 시민들은 악명 높았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고 무기를 탈취 하였다. 바스티유를 점령한 파리 시민들은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려는 기득권층이었던 왕당파에게 저항하였고 파리 시내에서 그들은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혁명은 전 프랑스로 퍼지게 되었고 기득권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을 없앨 수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1893년부터 1895년 사이에 일어난 조선의 농민운동으로서 대한민국 역사이래 가장 규모가 컸던 농민 운동이었다. 당시 양반이라 불리던 기득권층의 부패와 탐욕에 억압받던 민중들이 일으 킨 운동이다. 당시 기득권층에게는 난으로 불리었겠다. 불공평하고 불공정했던 사회 체제에 불만을 느낀 민중들은 고부군청을 습격하였고 무기를 탈취 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은 그 세를 크게 하여 전국으로 확산되려 하자 당시 조정이 일본군에 대한 개입을 요청하였다. 10만 동학농민운동군과 1만5천의 일본군의 전투는 신식 무기를 갖춘 일본군의 승리로 돌아 간다. 동학농민운동가들이 당시 조선 조정에 요청 한 폐정개혁 12조는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 본다면 매우 합리적이고 국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요청한 것이었으나 조정은 들어 줄 기미를 보여 주지 않았다.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 숙청
  3. 횡포한 부호 처벌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5. 노비문서 소각
  6.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7. 과부 재가 허락
  8. 이름 없는 잡세 폐지
  9. 인재 등용, 문벌 타파
  10.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11. 공사채(公社債) 면제
  12. 토지 평균 분작

— 폐정개혁 12개조


독립운동(레지스탕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 된 국가 내에서 독일에 편입 된 정부와는 다르게 독일에게 독자적으로 대항을 한 사람들을 레지스탕스라고 한다. 그들은 적은 수의 병력으로 파괴 공작, 게릴라전을 펼치며 독일 무력 점령에 항거 한다. 수 많은 레지스탕스들이 독일과의 전투 중에 사살 되었다. 독일 군이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불법으로 못 박았다. 조선이 일본의 무력 점령 당하였을 때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 내에서 그리고 밖에서 평화적인 방법과 무력적인 방법을 통해 국가의 독립을 얻으려 노력했다. 조선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그들 독립운동가들을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 반란자들로 명명 하였으며 탄압하고 제거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썼다. 유럽의 레지스탕스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요구 한 것은 합법적인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였다. 

부산마산민주항쟁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있었던 부산과 마산의 민주항쟁이다. 그 당시 팽배했던 부익부 빈익빈에 대한 불만과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민중들이 주도 한 항쟁이었다. 항쟁 시에 시민들이 외친 구호는 민주화와 유신철폐였다. 시민들은 그들의 존엄한 자유와 권리에 대한 주장을 하였고 당시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 군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59명의 시민이 체포 되었고 군사 재판에 회부 되었다. 계엄령은 내란, 반란, 전쟁, 폭동, 국가적 재난 등 비상 사태로 인해 국가의 일상적인 치안 유지와 사법권 유지가 불가하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과 정부가 내릴 수 있는 조치이다. 유신철폐와 정당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국가 반란을 일으 킨다는 명목으로 계엄령을 내린 것이다.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 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현지를 시찰한 뒤 당시 상황에 대해 내린 결론

역사에 나오는 항쟁,혁명은 민중과 국민이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사회를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염원에서 나온 권리를 주장 했던 이야기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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