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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인문사회

인생, 삶이 공허하다고 느껴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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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원제 Man's searching for meaning)



2차 세계대전이 세상, 특히 유럽과 미국에 끼친 영향은 어떠한 형용사로도 명확하게 묘사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지금도 수 많은 문학작품들과 영화, 드라마로 제작이 되고 학문적으로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인간 역사의 부분이다. 특히, 나치독일이 저지른 유대인학살이라는 만행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 그 이상으로 존재하고 있을 정도이며, 독일은 이에 대해 지금도 반성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질병이나 전쟁이 아닌,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인간이 인간을 천백만명을 살해, 아니 학살한 사건은 전쟁으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충격으로 다가 올 수 밖에 없다. 그 중 약 600만명은 유태인으로 200백만명 정도의 유태인여성과 300백만명의 유태인남성 그리고 100백만명의 유태인 어린아이들이 학살 당했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유태인 900백만, 약 2/3가 누군가의 정책과 계획으로 인해 아무 의미없이 학살 당한 것이다.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구타, 총, 가스, 그리고 굶주림에 의해 죽어 나갔다. 그 수 없이 많은 희생자 속에서도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다. 상상만으로도 지옥같았던 공간 속에서, 인간이 인간일 수 없던 장소와 시간 속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 중 한 명이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이다. 의미치료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그의 자매를 제외한 대부분의 모든 가족을 잃어야만 했다. 모든 것을 잃은 인간이, 동물보다 못 한 취급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텨 살아 남은 것이다. 심리학자인 그는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는 환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던 의사였다고 한다."왜 자살하지 않습니까?" 



'왜 자살하지 않는가?' 에 대한 질문은 '왜 사는가?'란 질문과 궤를 같이 한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누구나 스스로에게 물어 봤을 법한 질문이다. '나는 왜 사는가?' 철학적이지만 누구나 누구에게 그리고 본인에게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머리를 붙잡고 고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삶의 의미따위는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끊임없이 던질 필요가 있는 질문인지, 질문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인지는 개인 판단의 몫이겠지만, 어느 쪽이던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오른손이 올라갔고, 매우 여유롭게 검지로 오른쪽 아니면 왼쪽을 가르켰다. 이 번엔 왼쪽 그리고 다음 번엔 오른쪽을 가르키는SS친위대 장교가 손가락으로 하는 이 하찮은 행동 뒤에 있는 불길한 의미를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왼쪽으로 가르킬 때가 더욱 많았다. 내 차례가 다가왔다. 오른쪽은 일터로 보내진다는 뜻이고, 왼쪽은 아프거나 일 할 수 없는 사람들로서, 특별수용소로 보내지게 된다고 누군가 속삭여 주었다.'    



나는 아닐꺼라는 착각과 환상은 그 안에서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SS대원의 손짓 한 번에 누군가는 가스방으로 누군가는 숙소로 가는 운명을 마주했어야 했다. 인간의 손짓 한 번에 삶의 연장과 끝이 결정이 되었다. 죽은 사람이 행운을 얻은 것인지, 살아 남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겪은 쪽이 행운이었는지는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서 운을 제외 한다면 무엇이 그들을 영속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이에 대답해주고 있다. 누군가는 살아 남았음에도 스스로 죽음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고, 누군가는 끝까지 살아 남았다. 한 명의 수용자로서 그리고 심리학의사로서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수용소에서의 일을 담담히 책을 통해 밝히고 있다. 무엇이 사람을 살아가게 할 의지를 만들어 주는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던 진 이 질문에 빅터 프랭클은 자신이 가진 답을 전달해 주고 있다. 


'몇 주 뒤에는 그 가치가 없어지기도 했지만, 담배 6가치와 바꿀 수 있는 교환권은 50페니 정도의 가치를 지녔었다. 나는 담배 12개의 가치를 지닌 당당한 교환권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이 것보다도 더 중요한건, 이 담배들이 열두 그릇의 스프와 교환 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일시적이나마 굶주림을 멈춰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담배를 필 수 있는 특권을 가진건 주당 정해진 교환권을 받을 수 있는 교도관들, 창고와 작업장의 십장, 또는 위험한 일을 한 대가로 여분의 교환권을 더 받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경우들을 제외하면, 살려는 의지를 잃은 사람들이 마지막 며칠을 '즐기기' 위 할 때 뿐이였다. 그러므로, 담배를 피는 동료를 보게 되었을 때는, 그가 살아가려는 의지에 대한 믿음을 포기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번 잃은 삶에 대한 의지는, 좀처럼 되돌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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