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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인문사회

리차드 아요아데의 영화 '더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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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영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아마도 영화를 보며 생각을 하기 싫어지면서 코메디 영화나 블록버스터 영화만을 찾게 되었을 때 부터인듯 하다. 볼 영화가 없다고 투덜거림에도 또 볼 만한 영화없나 하고 두리번 거리는건 습관탓 일런지 모르겠다. 우연하게 '더블'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단지 제시 아이젠버그의 얼굴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별 생각없이 헐리우드의 영화겠거니 하며 틀었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영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울하고 기괴한 분위기 였지만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확실히 영화의 기괴하고 우울한 분위기의 연출이 나의 흥미를 잡아챘다. 



영화 내용이 포함되 있으니 영화를 보고 싶은 분은 글을 읽지 않는게 좋을 듯 하다. 



주인공은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말도 제대로 걸지 못 하는 성격에 일은 열심히 하지만 직장동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심한 그저 그런 사람이다. 심지어는 홀어머니에게도 무시받고 매일 보는 직장의 경비조차도 그가 누군지 기억 못 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와 똑같이 생긴 하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제임스가 나타난다. 주인공과는 정반대로 어디서나 당당하고 직장동료들에게 인기도 한 몸에 받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다른 여자들과의 잠자리도 서슴치 않는 그런 남자다. 




  

제임스가 나타나는 장면은 머릿속에 바로 다른 영화 한 편이 지나가게 끔 한다. 브래드 피트와 에드워드 노튼이 주연한 영화 '파이트 클럽'이다. 소심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소시민이 자신의 본모습을 견디지 못 하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내는 영화라는 것에서 두 영화의 공통점이 생긴다. 결국 영화 막바지에 가서는 자신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라는 것을 깨닫고 새롭게 나타난 자신의 새로운 자아를 없애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 된다. 



 



파이트 클럽 쪽은 모르겠지만(파이트 클럽이라는 소설 원작이 있다) 영화 더블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을 원작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분신이라는 소설이 1846 년에 발표가 되었으니 넓은 시각에서 보면 파이트 클럽도 사실 새로운 소재라고 하기는 어렵다. 150 년 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시각으로 본 사람들의 사회적 문제를 현재의 사람들 또한 비슷하게 겪고 있는 것을 보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천재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닌듯 하다. 






'더블'과 '파이트 클럽'은 똑같은 주제를 분명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굳이 시각을 분리해 보자면 파이트 클럽 쪽은 서양의 시각으로 더블은 동양의 시각으로 바라본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다. 파이트 클럽에서의 주인공은 자신의 새로운 자아와 함께 세상의 체제와 체계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파이트 클럽에서는 새로운 자아는 자신들을 억압하고 정해진 틀에서 생각하게 하는 체제를 깨고 진정한 남성성과 자아를 찾아야 한다 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을 붕괴시키려고 질서를 어지럽히려는 각성한 주인공이 결국 새로운 자아를 막아낸다. 모든 것을 틀에 맞추려하고 개인을 억압하는 세상을 붕괴시키려 하는 것, 곧 자신의 문제를  내적 문제로 보지 않고 외적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변하게 만드는 사회, 자신을 꾸미고 세상이 원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세뇌하는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시각이 강하다. 그 속에서 개개인이 억압에 저항하고, 그 개개인이 억압에서 벗어나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무리를 이룬 개인들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논리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더블의 경우는 세상의 억압에서 자신이 변화하는 건 본인의 선택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변화한 자신의 새로운 자아를 동경하고 따르려 하지만 서서히 변해가는 자신의 본질에 주인공은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새롭게 등장한 자신의 다른 자아로 인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참지 못 하게되고,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괴로워하며 심지어 자신이 원하던 새로운 자아에 분노까지 하게 된다. 더블의 주인공은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이 되지 못 한 인간에서 모두가 동경하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에서는 영화 파이트 클럽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은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야 했어야 하는 이유를 사회 속에서 찾지 않는다. 결국 자신이 깊은 욕망 속에서 자신이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냈고 그 새로운 자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과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이 되려는 노력은 사회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자신의 선택이라는 시각처럼 보인다. 더블 또한 파이트 클럽 처럼 주인공이 자신이 만들어 낸 새로운 자아를 알아차리고 자신의 다른 자아를 죽여 버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자신이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본인이 가진 정체성으로만 존재한다 해도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사회가 어떤 시각으로 자신을 보아도, 사회가 원하는 성공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아도 자신이 특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요즘 나오는 영화에 비해 지루하고 느릴수 있다. 권선징악이 있는 다른 영화들처럼 명확한 방식으로 진행 되지 않는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대조되는 전형적인 유럽식 영화가 아닐까 한다. 사실 영화에 더 흥미롭게 만들게 해준 것은 영화가 끝이 나고 나오는 엔딩 크레딧 곡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잘 못 들었나 싶었지만 확실히 한국 노래였다. 영화 중간에도 일본 노래가 나오기에 감독이 특색이 있구나 정도였지만 한국 노래가 나올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마지막 노래를 듣게난 후 감독이 누굴까 라는 궁금증은 한국사람이라면 당연히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감독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개인적으로는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리차드 아요아데, 분명 어딘가에서 들어 본 이름인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검색을 해보니 IT 크라우드 모스 역으로 등장했던 그 배우였다. IT 크라우드에 푹 빠져 새로운 시즌이 나오기를 바랬었던 팬으로서 반갑기도 하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랄까. 내가 몰랐었던 것이지 감독은 이미 영국에서 작가, 코메디언, 감독 등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나이지리아인 아버지와 노르웨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캠브릿지를 졸업한 수재라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게됐다. 








이미 이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다 알게된 것이나 다름없다. 본의 아니게 글을 끝까지 읽고 영화에 흥미를 잃었다면 심심한 유감의 표현을 전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니 볼 영화가 정말 없을 때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다. 영화의 마지막 곡은 1970년대 부터 1980년대 까지 신중현과 함께 활동한 가수 김정미의 햇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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