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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인문사회

사대주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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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신라까지만 해도 사실 어느 정도 좋았다. 엄청난 국력을 자랑하던 당이 고구려를 신라와 멸망시키고 신라의 뒤통수를 칠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고구려 멸망 후 신라를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려던 당나라는 새로운 강적 토번을 만나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신라는 당의 야심을 물리 칠 수 있었다는 이론도 존재하지만, 어쨌든 신라는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밀어냈다. 발해는 어떤가, 역경과 고난을 물리치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정통성으로 나라를 세웠고 예전 고구려의 영토를 거의 대부분 찾게 되기도 했다. 아니, 사실 고려까지도 어느 정도는 인정해 줘야 한다. 몽골에서 말달리던 징기스칸이 유목민들을 정복하고 규합하여 중국본토를 치고 그의 후손들이 고려를 쳤을 때도 고려는 바로 항복하지 않았다. 항복을 하고 나서도 고려사람이 왕이 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냈다. 물론 몽골의 공주와 결혼해야 되는, 결과론 적으로는 고려 몽골의 혼혈인 왕권이 생기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왕씨가 국가의 왕으로서 존재해야 된다는 절대조건은 지켜냈다. 그 뒤로도 요동정벌과 같은 움직임도 있었다.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마음과 정신으로 북벌은 하나의 정치적 과제로서 존재했었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 내에서도 북벌은 언제든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은 정치적 주제였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고조선의 이름을 딴 조선이 고조선의 영토와 고구려의 영토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갖는건 당연하지 않은가.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던 후대의 조선 내에서는 북벌은 단순히 꿈과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였을진 몰라도 여튼 북벌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있어왔다. 



사대의 역사를 어디서부터 봐야 할지는 명확하진 않지만 조선시대 때에도 사대를 벗어 날 수 있었던 역사적 순간이 있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왕자의 난이 성공하지 못하거나 왕자의 난 이후에라도 조선(이방원이)이 만약 명나라에 스스로 무릎을 꿇지 않고 북벌을 감행했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은 해 볼만하지 않은가.


고려시대 한반도는 원나라에 의해 200년간 지배를 당하게 된다. 중국만큼은 아니더라도 몇 백년간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등 여러 나라의 이름으로 나라를 유지 할 수 있었던 힘이 있던 나라들이 존재해왔다. 나름 동북아에서는 최고는 아니더라도 강자로서 존재하던 시절도 있었고 그런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시각으로 성을 쌓고 문화를 갖고 있던 고려가 성도 없이 들판을 달리던 북방 유목민족이 눈에 들어왔을리가 없다. 그런 나라가 유목민에 의해 무너지는 중국을 보고 심지어 자신들의 목을 달아나게 할 수 있는 힘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결과는 200년간의 지배다. 고려말기의 사람들에게는 강한 나라의 지배하에 사는게 익숙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문화를 지키는 것이 전쟁으로 나라 전체를 잃어버리고 모든 걸 잃어 버리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라고 느껴졌을 법도 하다. 어찌보면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세상을 살고 있던 정치가, 학자 그리고 나라를 이끌던 무리들의 머릿속에 사대의 예라는 단어만큼 합리적인 선택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기라는 속담에 그래도 계란이 뭔가 이뤄낼 것 같은 왠지모를 희망이 들어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결과는 천번을 하던 만번을 하던 똑같다. 계란으로는 절대 바위를 깰 수 없다. 그래도 이 속담에 대한 반감으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다면 말릴 수는 없지만 말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건 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들이 살던 시대가 고려의 말기 정도 아닐까 한다. 그랬던 사람들이 정권을 쥐고 있었고 권문세족의 반대파로 새로이 등장한 신진사대부도 사실 고려내부에 대한 개혁을 주창했지 사대주의의 예를 더욱 강조했다. 권문세족이나 신진사대부나 외교적 노선은 아마 같았으면 같았지 그리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대를 통한 나라의 안정 말이다.           


그런 면에서 정도전의 사대를 무시한 요동정벌은 특기 할 만하다. 당시의 의견이 사대를 떠나 전쟁자체가 성공하지 못 할 것이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일 같이 맞기만 하고 주먹한대 내뻗지 못 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전쟁을 성공으로 결과를 맺었다면 아마도 조선 600년의 역사는 명에서 청으로까지 이어지는 사대로 이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스스로 백기를 든 명에 대한 사대, 힘으로 무릎을 꿀리고 사대의 예를 강요한 청에 대한 굴욕적인 역사가 정도전시대에 단절 될 수도 있었을 수도 있다. 전쟁성공의 확률은 언제나 다양한 변수로 바뀔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정도전의 요동정벌 시도가 무조건 무모했다고 판단할 근거도 없거나 약할 수도 있다. 게다가 도전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위험이 무서워 몸을 낮추기만 한다면 얻을 수 있는 건 절대 그리 많지 않다. 


중국본토를 치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요동땅을 공략하고자 했으니 말이다. 지금과 같이 각 나라의 군사력이 극명하게 차이가 나던 시절도 아니었다. 칼과 활 그리고 돌을 던지던 시대의 전쟁이었으니 아마 정도전의 도전을 지금의 시각으로 무조건 무모하다고 말 할 수는 없는 또 다른 이유다. 몽골이 유목민족에서 국가로 그리고 정복국가로 탄생할 수 있었던 시대와 큰 차이도 없지 않은가. 여튼 사대를 외향으로는 사대의 예를 중시했지만 사대의 예는 서로가 존중하고 평화로울 때나 지키는 것이라는 속마음이 있었기에 고려시대 실패했던 요동정벌을 다시금 노렸던 것이 아닐까 한다. 만약 그 때 정도전과 이성계가 요동을 치고 요동 땅을 조선으로 편입시킨 뒤 안정을 지켜냈다면 고려시절 굳어진 사대의 예에 대한 뿌리는 큰 부분이 잘려 나갈 수 있었지 않나 싶다. 만약 이방원의 왕자의 난이 막히고 조선이 요동땅 정복을 실행에 옮기기만 했었도 사대주의에 대한 역사가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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