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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인문사회

헬조선은 원래 존재하지 않던 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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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지옥, 개미지옥 처럼 사용되는 단어 헬조선.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희망도 없고 꿈도 없는, 아니 희망과 꿈을 가져도 하등 인생에 변화가 없는 곳이라는 뜻이으로 여겨진다. 2002년 꿈은 이루어진다는 표어가 13년이 지난 지금 이 문장이 월드컵 4강을 증명한 뒤로는 거의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선수들, 뉴스나 신문을 통해 간간히 들려오는 몇 몇 사람들의 인생 성공 이야기를 제외하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한국을 헬조선에 빗대는 사람들에겐 그저 듣기 좋은 허상일 뿐이다. 


IMF 이 후, 중산층은 무너져 가기 시작했고, 다수의 중산층을 이루던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정규직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전체 일자리가 준 것은 아닌지 비정규직의 일자리는 더욱 많아졌다. 더욱 저렴한 인금에 같은 시간 -간혹 더 많은 시간- 일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뜻이다. 스펙, 기계가 가진 사양을 뜻하는 단어를 사람에게 붙여 스펙 쌓기라는 말이 열풍이 불었다. 스펙이 좋아야 대기업에 취직하고, 스펙이 좋아야 적어도 비정규직은 안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패했다. 아니 아마 지금도 대기업에 붙기 위한 스펙 쌓기의 열기는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의 헬조선에서 살아 남기 위해선 맨발, 맨손으로 공업화를 일구어내고, 영혼을 바쳐 민주화를 이루어 낸 세대보다 더 똑똑하면서도 창조적인 거기에 경험까지 갖춘 영혼을 바쳐 일 할 우수한 사양을 가진 사람이 살아 남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런 열심노력과 영혼바칠 준비를 할 마음을 먹어도 이 헬조선에선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기가 힘들며, 제대로 된 직업을 구했다 한들, 아니 그냥 직업이라는 것을 구했다 하더라도 지구상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과 업무강도를 이겨내야 하는 철인이 되어야만 한다



일리단 잡으면 게임 끝나나?


칼퇴근이라는 말은 마치 직장계의 이단아, 강심장, 또는 선택받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쓰는 용어처럼 굳어져 버렸다. 계약서에 쓰여진 하루 근무량은 무시되기 일수이며 근무시간을 초과한다고 해서 정당한 댓가를 요구하지도 못 하는게 태반이다. 근무외 잔업은 취업을 시켜준 회사의 은혜로운 요구다. 하물며 이런 상황을 보도하는 언론계조차 헬조선이 가진 특징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긍정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헬조선은 더 길게 그리고 끈질기게 살아남게 되지 않을까 한다. 




밥이라도 먹고 살만한 시절로 변해갔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저당잡힐 땅때기나 팔 논답이나 소라도 있어 대학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국민학교 내내 물배만 채우다 돈이 없어 중학교도 못 가거나 고등학교의 꿈을 접기도 했어야 했다. 먹고 살만 해졌다고는 하지만 빈부의 격차는 여전히 컸고, 먹고 살만한 사람은 더 먹고 살만해지던 시절이다. 이리 말하니 큰틀에서 보면 누군가가 말하는 지금의 헬조선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여하튼, 당시의 헬조선은 분출구가 되준 것은 하나의 희망이었을지 모른다. 사회의 체제를 바꾸면 무지개 넘어 있는 희망 언저리 어느 곳에 도착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을지 모른다. 법치국가, 민주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생을 바칠만한 희망의 끈이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 희망도 없다. 투표날, 투표장에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다. 어느 쪽이고 투표율을 높이자고 아우성인 상황이다. 그리고 쌀밥에 고깃국 먹는게 소원이었던 예전의 헬조선과는 다르게 지금은 건강을 위해 쌀밥을 멀리 하는 실정이다. 직장이 없다고 해서 하루 삼시세끼 라면만 먹고 사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은 곳이 지금의 헬조선인 것이다. 


사회의 급작스런 변혁은 탈출구가 완벽하게 막혔을 때, 그리고 모든 잘 못이 한 중점으로 모일 수 있을 때 일어 나고는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라는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몰라도, 빵이 없어 빵을 달라고 외치던 파리의 시민들의 적은 전쟁과 사치로 국가재정을 바닥내고 빵이 없어 굶는 사람들의 집에서 더 털어갈게 없나 기웃거리던 왕족과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반대의 입장인 헬프랑스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은, 왕권을 옹호하며 보호하기 위해 칼과 총을 들기도 했을 것이다. 다만 그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기엔 그들에겐 명분도 그리고 더 이상의 폭정을 이어나갈 힘도 없었다. 한국의 근대사, 격동의 60-80년대는 어떤가, 최고로 가난한 국가에서, 도움을 받던 국가에서 도움을 주는 국가로 거듭나던 그 시대 또한 다를 것이 없다. 대다수가 굶고 대다수가 같이 힘들어 하던 시절에서 조금씩 나아지던 시대 말이다. 만약, 공장에서 일하던 순이가 12시간을 일하고 일요일에 쉴 수만 있었다면, 일한만큼 돈을 받고 쉬는 시간과 자신의 삶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면 그 많은 노동자들이 최루탄을 맞기 위해 거리로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당한 노동시간에 노동자들이 착취 당할 때 법은 무용지물이었다. 누군가는 노동법을 공부해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사방팔방 뛰어 봤지만 그 또한 헬조선 안에서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많지 않았던 듯 하다



헬조선엔 공황이 닥친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인다. 역사책 속에서나 보던 그 공황을 겪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대량의 실업자가 거리로 나 앉지 않는 것만 다를 뿐이다. 국가를 이끌던 경제 원동력이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많은 직장들이 사라졌지만 인구는 여전히 비슷하다. 자리가 생기지 않는데 억지로 늘릴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라도 사람들을 취업시키겠다는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대선 공략에서 일자리창출 이라는 단어를 쉽게 들을 수 있는건 절대 우연히 아니다. 새로운 일자리, 더 많은 중산층, 중산층의 생활향상, 극빈층을 위한 구호보다 중산층을 위한 공략과 구호가 많을 수 밖에 없다. 실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중산층이 어디에나 절대 다수로 존재하는 시대이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했던 것도 일자리를 잃거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 한 중산층이었다. 헬조선이라는 말도 지금 당장 노력을 할 만큼의 여력이 있는, 또는 적어도 한 때는 있었던 중산층들이 만들어 내고 그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사라질 날은, 누구나 노력하면 꿈은 아니더라도 합당한 일자리를 얻고, 그에 더 해 일한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일하는 세상이 도래하게 될 때가 아닌가 한다. 말하고 보니 이런 세상을 누렸었던 사람들이 다수였던 시절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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