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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정치

(별세) 독재자의 딸 라나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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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ime.com/time/photogallery/0,29307,2100515_2324867,00.html 원문 www.time.com

1926 2월 28일 태어난 스베틀라나 스탈리나는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과 그의 두번째 아내의 딸입니다. 소련에게는 잔혹한 스탈린이였지만 그녀의 딸에게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녀는 소련내에서 단숨에 셜리템플과 같은 유명인사가 되었고 수많은 아기들의 그녀의 이름을 딴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불행은 어린나이에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1932년 그녀의 어머니는 자살했고 그에 대한 사실은 6살 스베틀라나에게는 비밀이였습니다. 그녀에게는 어머니가 맹장염으로 죽었다고 전해졌으며 10년 후에서야 그녀는 진실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 스탈린과의 관계도 다난해졌습니다. 스탈린은 그녀의 첫사랑이였던 영화감독을 시베리아로 10년간 유배시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그녀가 공부하고 싶던 문학을 공부하지 못하게하고 대신 역사를 공부하게 끔 강요합니다. 

그녀가 성년이 되어가면서 소련과의 관계도 불편해져 갔습니다. 그녀가 십대 시절 그녀의 오빠는 독일나치에게 인질이 되고 독일은 그를 돌려 보내는 조건으로 소련에 인질로 잡혀있던 독일의 장군과의 교환을 요구합니다.  스탈린은 이를 거부하고 그의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대학 후에, 그녀는 동창과 결혼하고 역사와 소련문학 선생으로 일하게 됩니다. 두가지 모두 스탈린의 뜻에 반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녀는 스탈린의 측근 안드레이 즈다노브에 재결혼을 하게 됩니다. 1953년 그녀의 아버지 스탈린이 죽고 난 뒤 어머니의 성이였던 알릴루예바를 그녀의 성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소련, 나라 밖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아버지가 죽은 뒤 시간이 꽤 지난 뒤로, 그녀는 당시 모스크바를 방문 중이던 인도인이자 공산당이였던 남성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스탈린이 살아생전에 그녀가 누릴 수 있엇던 특권을 잃어가고 있던 중이였지만 소련 정부는 그와의 결혼을 그녀에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병으로 죽은 뒤 그녀는 그의 유해를 인도로 가져 갈 수 있게끔 허락을 받았고 그녀는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공공연하게 망명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뉴델리에 있던 미국대사관을 찾아 망명을 요청하였으며 미국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하였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그녀의 뉴욕 도착을 최대한 언론에 밝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노력은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갑니다.

1967년 스베틀라나는 그녀의 자서전 친구에게 보내는 20통의 편지를 끝내고 공영 TV에 게스트로 참여하여 그녀의 책에대하여 인터뷰 하였습니다.  미국에 살게 되면서 그녀는 소련에게 비판적이 되었고 공개적으로 그녀의 소련 여권을 불태우고 소련으로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 합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도덕적 정신적 괴물이라 칭했다고 합니다. 그녀와 미국내의 반소련 정서는 그녀의 소련에 대한 시각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지만 그녀는 소련에 남겨진 자신의 자녀들이 그립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습니다. 

1970년 스베틀라나는 윌리엄 웨슬리 윌터와 결혼하게 되고 공식적으로 짧은 이름인 라나 피터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됩니다.윌리엄은 미국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롸잇트의 견습생이였고 그의 딸의 전남편이기도 했습니다. 라나와 윌리엄은 아리조나로 이주를 하였으나 라나는 그곳에서의 생활과 프랭크의 미망인과의 관계에 만족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2년만에 막을 내렸고 라나는 8개월 된 딸 올가의 양육권을 가져오게 됩니다.

세계는 스베틀라나의 소련에 대한 감정에 대한 놀라운 반전과 그녀의 아들 이소이프와의 관계가 재점화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둘은 영국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이소이프의 출국신청은 소련정부에 의해 거절 당했습니다. 1984년 그녀는 모스크바를 여행하게 되고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해달라고 간청하게 됩니다. 그녀는 서방을 비난했고 그동안 CIA의 종이였다고 말 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딸 올가는 소련의 시민권을 얻었지만 그녀와 그녀의 첫번째 자식들과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그녀와 올가는 2년만에 소련을 떠나 위스콘신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위스콘신으로 이주 후에 그녀의 삶은 비교적 잠잠해졌습니다. 비록 그녀는 첫 번째 전기와 또 다른 한권의 책으로 250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나 말년에 대부분의 돈을 기부와 축적된 빚을 갚는데 사용했습니다. 올해 11월 22일 리치랜드 센터에서 결장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아버지, 스탈린의 그녀를 위한 진정한 감정은 애정이였지만 그의 압도적인 존재는 그녀의 인생전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나는 언제나 나의 아버지 이름의 정치범 일 것 입니다."

향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하신 라나 피터분에 대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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