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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Life/주식&경제

코스피 시장은 과연 붕괴될까? 미국역사로 살펴보는 주식과열과 경제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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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부터 1929년은 미국 경제의 황금기  하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장하는 미국경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사람들은 몸을 치장하고 샴페인을 터뜨리며 아메리칸 드림의 황홀경을  보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었고 아메리칸 드림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뉴욕의 월스트리는 인간욕망의 정수였다. 너나   없이 미국인들은 월스트리트로 모여 주식을 거래했고 투기를 행했다. 백만장자부터 부랑자까지 1달러라도 있다면 모두 주식을 사야 한다는 말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1929년 8월 주식지수가 고점을 찍던 그 여름, 그 누구도  때가 호황기의 끝이자 10년간 이어질 대재앙의 시작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했다. 하지만 이미 시장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생산량은 줄어들고 있었고 고용율도 하락하고 있었다. 

 

 

임금은 바닥을 기고 있었고 가계빚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었다. 엎친데 덫친격으로 가뭄과 음식가격조정 실패로 농업시장도 힘든 시기를 겪는 중이었다. 은행은 이미 유동성 없는 막대한 대출을 떠안고 있는 상태였다. 

 

1929년 8월, 공황의 전조는 미지근한 물이었다. 소비자 지출이 조금씩 줄기 시작했고 재고물품이 창고에 쌓이기 시작했다. 공장 가동률의 둔화는 당연지사였다. 그럼에도 주식가격은 끝간데 모르고 상승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모든 사람들이 주식이 고평가를 넘어 말도 안되는 가격에 거래 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10월 24일 1929년, 불안해진 투자자들이 주식을 대량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두려워 하던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1290만주가  하루만에 거래 됐다. 금융역사에 이름을 남긴 검은 목요일이었다. 

 

검은 목요일   5일이 지났다. 1600만주가 거래됐다 월스트리트는 당황을 넘어 공황에 빠졌다. 수백만주가 종이조각이 되었으며 빚으로 주식을  투자자들의 손에는 주식이 아닌 종이조각이 은행 통장에는 잔고가 아닌 빚이 찍혀있었다. 

 

 

소비경제는 침체를 넘어 바닥을 뚫고 들어갔고 공장들은 문을 닫거나 직원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생산력이 줄어들고 실업자는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당장 해고를 면한 노동자나 회사원들도 월급이 깍이거나 제대로  임금을 받지  하는 처지가 된다. 물건을 구매할 소비자가 줄어들게  것이다. 악순환의 시작이다. 

 

금본위제로 묶여 있던 세계경제는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려간다. 특히 미국경제와 유럽경제는 밀접했기에 미국의 도산은 유럽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대통령 후버의 노력에도 불구 하고 경제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검음 목요일   3년간은 최악에 최악을 맛보는 순간이 이어진다. 1930년 4백만의 실업자는 구인의 구자도   없는 처지에 빠졌고 1931년에 들어가서는 6백만명으로 불어나게 된다.

 

 집이 없는 부랑자는 미국 전역에서 매우 흔한 풍경이 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이 악몽으로 전국을 뒤덮게  것이다. 농부들은 자본과 인력이 없어 작물들을 수확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굶어 죽어 나갈  농장의 작물들도 함께 썩어나가는 모순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심지어 텍사스에서 네브라스가까지 일어난 자연재해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은행까지 믿지  하게 됐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수차례 뱅크런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전국의 은행으로 달려가 현금을 인출했고 수천개의 은행이 문을 닫고야 만다. 

 

후버정부는 이런 은행에 세금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은행이 기업에게 빚을 내주고 기업이 기사회생하여 실업률을 낮춰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리퍼블리칸이었던 후버는 정부가 민간경제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버 대통령의 바람과는 반대로 1932년 실업자의 수는  오백만이 되었고 민주당 루즈벨트 대통령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꼴이 된다.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뱅크런의 두려움에 루즈벨트는 취임식날 모든 은행에 영업종료를 명령한다. 심지어는 미국 정부도 공무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불  능력이 되지 않았다. 은행의 문을 닫은 루즈벨트는 꾸준한 방송으로 미국인들을 안정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100일 동안 농업과 산업을 안정시키고 직업을 창출하는데 모든 역량을 총동원했다. 1929년과 같은 주식시장의 붕괴와 뱅크런과 같은 사고를 막기 위해 금융법을 뜯어고쳤고 새로운 신설부서를 마련해 위험에 대비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뉴딜 정책이   등장했으며 관급토목공사로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게 된다. 그리고 정규직 창출 프로그램을 통해 8백50만의 실업자가 1935년에서 1943년까지 직장을 새로 얻을  있게 되었다.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산업화 국가  유일하게 실업보험과 사회보장이 없었던 국가가 미국이었다. 1935년 의회는 사회보장제도법안을 통과시켰고  법안으로 인해 실업자, 장애인 그리고 노인들을 위한 연금이 신설되게 된다.

 

1933년 경제의 회복세가 어느 정도 들어나자 미국경제는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했고 매해 9%의 GDP성장률이 시작되게 된다. 1937년 다시 한번 경기침체를 겪게 되지만 1938년 다시 회복하게 된다.  2차 경제위기로 인해 미국인들이 공황을 10년간 체험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공황으로 인해 유럽 또한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헤어나올  없는 경제적 파탄을 맞게  곳이 독일이었다. 돈을 수레로 끌고 다녀야  만큼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은 정치상황 또한 극변하게 되었고 결국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이 정권을 잡게 되는 상황까지 흘러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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