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ity Life/영화음악연예

단편 - 치정극

반응형

박달석이 돌아온 건 한 달 여 남짓 뒤였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양손에는 선물을 가득 들려있었다.

 

"누님, 내 왔소."

 

"아이고, 뭘 이리 많이 들고 왔어?" 신희어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번에 돈 들어 올 구멍이 좀 있었소. 받으시오. 누님이랑 신희 옷가지, 얼굴에 칠할 분 좀 사 왔소."

 

달석이 가게 앞 평상에 선물꾸러미를 풀어놓았다.

 

"옷 때깔 좋구먼. 돈을 이렇게 많이 써도 되나?" 싱글벙글한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됐고, 그냥 입고 쓰고 하소. 내가 또 다음번에 벌면 더 좋은 거 해줄 테니. 오늘 저녁은 쇠고기로 배에 기름칠 좀 합시다."

 

"내가 아주 상다리 뿌러지게 오늘 저녁 차려주겄구만."

 

"그나저나, 신희는 어디갔소?"

 

"어디가 긴, 뒷 산에 나물 캐러 갔지. 금방 올 거야."

 

"누님, 내 읍내에 신희 자리를 하나 마련해놨소. 식모자리인디, 돈도 쏠쏠하고 어디 머물 자리 걱정도 없고, 신희한테 이만한 자리도 없구먼."

 

"워메, 오늘 내가 복에 겨워 죽어도 여한이 없겄네. 달석이 밖에 없다. 이 누나 챙겨주는 건." 신희어미의 웃는 얼굴이 단 한 번도 가시질 않았다.

 

"방에 들어가서 눈 좀 붙여이. 국수 말아 놓고 깨울 테니께."

 

"알았소, 허허." 달석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막걸릿집 쪽방에 들어갔다.

 

신희가 나물 가득한 소쿠리를 들고 돌아왔다.

 

"엄니, 내 다녀왔소. 나물이 사방천지라 잔뜩 뽑았소." 가게를 들어오며 달석의 신발을 보았다.

 

"삼촌 왔네." 쪽방 미닫이문을 열어젖혔다. 시선이 달석에서 금방 선물더미로 옮겨갔다.

 

"저것들이 다 뭐여?" 신희는 신발을 던지듯 벗고는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등 돌아 누워 자는 달석은 아랑곳도 않고 선물을 뒤적거렸다. 달석이 움찔움찔거리더니 눈을 떴다. 누운 자리에서 고개만 돌려 신희를 보았다.

"신희 왔구먼. 삼촌이 너 입고 바르라고 옷이랑 분 사 왔다."

 

"이게 전부 내 거요?"

 

"욕심도 많네 그려. 네 엄니 거랑 내 것 따로 있다. 허허." 달석은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이것아! 다 어디 안가니께 나와서 상이나 차려! 네 삼촌 배고프겄다!" 신희의 어미가 소리쳤다. 어미의 소리를 분명 들었음에도 양 손에 쥔 새 옷을 보며 웃기만 했다.

 

"어서 나가서 엄니 도와드려라, 또 한 소리 하시겄다."

 

신희는 옷가지를 가슴에 한 번 품었다 내려놓았다. 방을 나가면서도 눈은 선물에서 떠나기를 힘들어했다. 신희는 상을 방 안으로 들이고 엄니가 준비한 국수들을 상 위로 날랐다. 국물이 넘칠 듯 면이 한가득한 국수 그릇들이 상 위로 올랐다. 후루룩 소리를 내며 셋은 허기를 채웠다.

 

"삼촌, 이 돈 다 어디서 나셨소?"

 

"그걸 네가 알아 어디다 쓰게. 그냥 삼촌이 좋은 일이 있어서 돈 좀 생겼다."

 

"그 좋은 일 나도 좀 하게 해 주소, 삼촌만 좋은 일 챙기지 말고."

 

"허허, 이것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너 줄려고 잔뜩 사 오지 않았냐. 그리고 이미 네 일자리도 읍내에 하나 구해두었다."

 

"정말이오? 나 이제 여기 말고 딴 데가서 일할 수 있오?"

 

신희는 달석의 선물보다 자신이 집을 떠난다는 사실에 더욱 흥분했다.

 

"요것 보게, 지 어미 떠나서 살 생각하니 그리 좋으냐 이것아!" 신희어미가 가시눈을 뜨고 핀잔을 주었다.

 

"그럼요! 당연히 좋지요! 여기 아주 내가 지긋지긋하요. 그냥 아주 지옥이오, 지옥."

 

"여기 사는 게 그리도 지겹냐?" 달석이 물었다.

 

"당연한 거 아니오.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이 뭐 없소 그냥. 맨날 막걸리 나르고 전이나 만들고 할게 뭐 있겄소. 아주 그냥 몸이 간질간질해서 못 살겄소."

 

"그려, 그렇기도 허지. 이 시골 깡촌에서 얼마나 심심하겠냐 네가. 이제 읍내 나가서 살자. 의사 댁 식모 인디 급여도 솔솔 하고 방도 하나 내준다고 하니까. 너한테는 아주 딱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린 아들 하나 둔 부부라는디, 그 집 안주인이 그렇게 나긋나긋하고 사람 좋다고 하더라. 의사 양반이야 뭐 맨날 바쁜 게 집에 늦게 들어오고."

 

"아니, 의사 집안이 여적 식모도 없이 살았다냐?"  신희어미가 놀란 듯 물었다.

 

"없었겠소, 원래 있었는디, 아줌마가 자식들이랑 산다고 서울 올라갔다 하드만."

 

"이제 읍내 가려고 아침부터 버스 타고 나갈 일 없겠네!" 신희가 기뻐하며 외쳤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내일모레부터 시작하니께, 그 집 데려다 줄테니께, 옷가지랑 뭐 가져갈 거 있음 챙겨서 삼촌이랑 같이 가자."

 

달석과 함께 신희는 버스에서 내렸다. 날은 화창했고 읍내에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희는 읍내의 공기를 맡으며 달석과 함께 걸었다. 달석이 사준 빨간 원피스에 얼굴에는 분도 칠했다. 열일곱 소녀의 얼굴은 분홍빛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인사 잘 드려야 한다. 집안 사모님이 양반집 규수라서 예의를 아주 중히 여긴다 하더라."

 

"내만 믿으요이. 아주 잘할라니까."

 

둘은 읍내의 시장을 거쳐 3층 병원 앞에 섰다.

 

 "여기가 이제 병원이고, 여기 뒤가 이제 니가 일 할 집이다."

 

"으리으리하구만요이."

 

병원을 돌자 2층 빨간 벽돌로 지어진 양옥집이 나타났다.

 

"워마, 집도 양옥집에 2층이구만."

 

신희는 양손에 가방을 쥔 채로 양옥집을 올려 보았다.

 

"내 깜빡했는디, 두 달은 니가 일을 잘하는지 안 하는지 보신다고 했고, 일을 잘하면 세 달 치부터 급여를 준다혔다."

 

"그럼, 두 달은 내 뭐 먹고 사요?"

 

"뭐 먹고살긴 이것아, 집에서 밥이랑 방은 준다했잖여. 걱정 말고, 바싹 일해서 눌러앉아. 그럼 만사 오케이여."

 

"있는 사람들이 더 하다더만, 이 집이 딱 그런 꼴이구만."

 

"투덜거리지 말고, 똑바로 잘혀."

 

달석이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누구세요." 부드럽게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저 박달석이여라, 왜 지난번에 제 조카 데려온다고 했던."

 

"아아. 네. 들어오세요." 덜컹.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워메. 이게 뭐여 문이 사람도 없이 지 혼자 열리네." 신희가 놀라며 말했다.

 

"촌티 내지 말고 어여 들어가자."

 

징검다리처럼 박혀 정문으로 이어지는 바닥돌들을 밟고 정원으로 꾸며진 마당을 지났다. 정문에는 안주인이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달석과 신희는 계단을 타고 정문으로 올라갔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이 쪽은 이제 사모님 댁 일 봐드릴 제 조카 신희입니다. 인사드려라"

 

"안녕하세요." 쭈뼛거리며 신희가 인사했다.

 

"반가워요, 신희씨. 들어오세요. 달석씨도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세요." 온화한 미소로 두 사람에게 친절을 권했다.

 

"아녀라. 저는 또 볼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삼촌, 벌써 갑니까?"

 

"그려, 일이 좀 있으니께, 일 보러 가야제. 사모님이랑 의사 선생님 말 잘 듣고 일 똑바로 잘 혀야 한다. 알았제?"

 

"알았어라."

 

달석은 집주인에게 목례하고 들어 온 길로 돌아갔고 신희와 집주인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 신발을 벗고 거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쪽에 슬리퍼예요. 신으세요."

 

"집 안에서도 쓰레빠를 신어요이?"  

 

"호호, 그럼요. 앞으로 집 안에서 슬리퍼 신고 다녀야 돼요."

 

집 안에서 신발을 신는다는 사실에 작은 놀라움이었다.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신희는 거실 크기와 가구들에 압도당했다. 건물 외관을 보았을 때 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크기는 막걸릿집 전체보다 넓어 보였고 티브이, 전화기, 벽에 걸린 그림들 그리고 장식품들까지 신희의 눈에는 모두 비싸 보이고 중요해 보였다.

 

"여기 앉아요."

 

신희가 소파에 앉았다. 처음 느껴보는 푹신함이었다.

 

"저는 한미경이에요. 반가워요." 미경이 손을 내밀었다.

 

"예." 신희가 손을 잡으며 악수했다. 심장이 떨릴 정도로 부드러웠다.

 

하얀 피부, 신희보다 큰 키, 단아하게 올린 머리, 온화해 보이는 얼굴, 쌍꺼풀이 없음에도 큰 눈을 미경은 가지고 있었다.

 

"이름 다시 한번만 말해줄래요?"

 

"서신희예요." 미경의 말투를 어설프게 쫓아하는 신희였다.

 

"그래요. 신희씨, 앞으로 잘 부탁해요."

  

"말 편하게 하세요. 사모님."

 

"말은 천천히 놓을게요. 집을 안내해 줄게요." 미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1층에는 안 방이랑 부엌 거실 화장실이 있어요. 2층에는 아들 방, 빈방 그리고 화장실이 있고요." 신희는 미경의 뒤에 따라붙었다. 평생을 막걸릿집 쪽방에서 살아오던 신희에게 미경의 집은 별천지 그 이상이었다.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처음 보는 물건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1층과 2층을 돌며 집 안을 보여주었고, 앞으로 신희가 사용하게 될 청소도구, 빨래 도구들과 식기들을 알려주었다.

 

"모르는 게 생기거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면 언제든 물어봐요. 내가 알려주고 다시 가르쳐 줄게요."

 

"감사합니다." 신희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세탁기 쓰는 법을 이해하지 못해 생긴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리고 이제 신희가 머물 방. 짐 챙겨서 가요 이제."

 

미경과 신희는 집에서 나와 뒤로 돌았다. 베란다 아래로 계단이 나있었고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바로 문이 있었다. 미경이 문을 열자마자 벽에 댄 손을 더듬어 전등을 켰다.

 

"침대보는 내가 이미 갈아 놨어요. 그리고 여기는 화장실이에요." 미경이 방안에 있던 다른 문을 열자 사람 한 명 딱 들어갈 만한 공간에 변기와 세면대가 있었다.

 

"그리고 샤워..몸 씻을 때는 여기 위에 이거 쓰면 돼요." 세면대 위 거울, 그 위에 걸려있는 샤워기를 가리켰다. 샤워기와 세면대의 물을 어떻게 쓰는지 알려주었다.

 

"편하게 입을 옷 가져왔죠? 옷 갈아 입고 조금 쉬다 올라와요. 조금 있다가 저녁 준비 같이해요. 별 일 없으면 저녁 준비는 저랑 같이해요."

 

"네."

 

미경의 발걸음이 충분히 멀어졌을 때야 신희는 침대 위에 앉았다.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방에 있는 침대부터 양변기와 세면대까지. 살면서 처음가져 보는 독방이었다. 불을 끄면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해지는 단 칸 지하방안이었지만 신희 마음에 꼭 들었다. 안 방에서 본 침대에 비하면 한 참 작은 침대였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에 연신 미소가 지어졌다.  

 

신희가 미경의 집에 들어온 지 석 달이 지났다. 자신의 있던 세상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막걸릿집에 드나드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상스러운 표현이나 욕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먹는 음식도 언제나 정갈했고 심지어는 고급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미경은 신희에게 음식과 청소를 가르쳐 줬다. 

 

미경의 남편 우진은 말수는 적었지만 친절하게 신희를 대해주었다. 아들 선호도 신희를 누나라 부르며 잘 따랐다. 집 안만이 따듯한 게 아닌 사람들도 신희의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신희도 식탁에 함께 앉아 함께 저녁을 먹었다. 언제나 바닥에 앉아 엄마와 마주 보고 먹던 식사와는 전혀 달랐다. 저녁 뒤에는 과일을 먹으며 소파에 앉아 티브이도 다 함께 보았다. 청소하고 밥을 하는 대가로 주어진 첫 월급도 신희에게는 꽤 큰돈이었다.  

 

그리고 자신만이 있을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반지하였지만 아늑했다. 

 

"신희야 오늘 옷을 좀 사러 나가자." 

 

"네." 

 

 

 

선선한 바람과 햇살이 만들어낸 가을 날씨는 외출하기에 더없이 좋은 풍경을 자아냈다. 읍내는 이미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시장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가득했고 미경 앞에 신희가 앞장섰다. 

 

"사모님, 제가 앞장설게요." 신희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 고마워라." 미경도 화답했다. 

 

 

 

시장통은 시끄러운 만큼 볼 것도 많았다. 흥정하는 사람과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 군것질 앞에서 엄마를 조르는 아이들까지, 사람들은 시장을 활기차게 하고 있었다. 

 

 

장을 따로 볼 일은 없었지만, 미경과 신희는 중간마다 멈추고는 음식재료를 구경도 하고 시장에 나온 물건들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웃으며 시장의 활기에 한 부분을 이 둘도 차지했다. 

 

시장의 끝 부분은 한복판과는 사뭇 다르게 조용하고 한가했다. 미경이 여러 옷 가게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가 좋겠다."

 

미경과 신희가 함께 옷가게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화장이 진한, 주인처럼 보이는 여성이 눈치를 살피며 둘을 맞이했다. 신희를 뒤따라 들어오는 미경을 보자 더 큰 친절이 얼굴에 묻어났다. 

 

"저기 잠옷이랑 원피스 있죠?"

 

"아무렴요, 있지요."

 

"몇 개만 보여주세요." 

 

주인은 작대기를 들고는 벽에 걸려 있는 잠 옷 몇 벌과 꽃무늬가 들어간 원피스를 몇 장 꺼내 내려놓았다. 

 

"혹시 이게 다인가요." 미경이 물었다. 

 

미경은 내려진 옷들을 하나씩 만져보고 들어 보았다. 신희는 옷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연히 더 있지요. 사모님이 입으실 거죠? 우선 이것들 한 번 입어 보세요. 아주 옷감도 좋고 가을에 입기 딱 좋아요." 

 

"아니요. 제가 입을 건 아니고 여기 이 아가씨가 입을 거예요." 미경이 신희를 가르쳤다. 

 

"네? 저요?" 옷을 둘러보던 신희가 놀라 대답했다. 

 

"우선 이것들 입어봐." 신희에게 자신이 고른 옷 몇 벌을 미경이 건넸다. 

 

"아니, 전 됐어라.." 신희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말고 입어, 괜찮으니까. 여기 갈아입을 곳 있죠?" 

 

"네, 그럼요, 여기 뒤쪽으로 오세요. 아가씨." 주인이 신희를 뒷방으로 안내했다.

 

신희는 어리둥절해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갈아입으라 해서 갈아입었지만 마음이 썩 편하지 않았다. 남의 옷을 훔쳐 입는 느낌이었다. 

 

신희는 갈아입을 때마다, 하나하나씩 미경에게 보여주었다. 미경은 웃으며 신희에게 예쁘다며 칭찬해 주었다. 몇 벌을 갈아입자 어색하고 불편했던 신희의 마음도 누그러졌다. 갈아입을 때마다 거울을 보며 새로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신기하고 예뻐 보였다. 

 

몇 벌의 옷을 사고 나온 뒤 미경은 혼자 화장품 가게에 들어갔다. 얼마 걸리지 않아 화장품이 든 종이백을 들고 미경이 나왔다. 신희의 들뜬 마음과 미경의 뿌듯한 마음이 둘을 연신 웃고 떠들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미경은 신희에게 옷을 다시 입어 보라며 부추겼다. 

 

신희도 싫은 내색 없이 미경이 사준 옷들을 하나하나 다 입어 보았다. 한 바퀴 빙그르 돌며 자랑하듯 보여주기도 하고 요조숙녀처럼 치마의 양 끝을 잡고 인사하는 모양새도 잡아 보았다. 신희가 좋아하는 모습을 미경도 행복해하며 지켜보았다.  

 

"근데 이 하얀 옷은 언제 입는 거래요?" 신희가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하얀 원피스를 입으며 물어보았다. 

 

"그건 잠 옷이야. 앞으로 잘 때는 그거 입고 자렴"

 

"딱 잘 때만 입나요? 잠잘 때만 입기에는 아까운디." 

 

"호호. 그래도 꼭 잘 때만 입어. 어디 나갈 때 입으면 안 된다." 

 

미경은 잠옷 입은 신희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아까 사 온 화장품을 꺼냈다. 

 

"신희야 머리 올려서 묶어봐."

 

신희는 시키는 대로 머리를 올려 질끈 묵었다. 

 

"우리 신희가 정말 이쁘게 생겼는데 꾸밀 줄을 모르니까. 이제 내가 가르쳐 줄게." 

 

"화장이요?" 

 

"화장을 할 줄 알아야 앞으로 멋진 남자 만나지." 

 

미경은 신희의 얼굴에 분을 정성스레 바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행복한 날들이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 나이였지만 신희 인생에서 이만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식모로 사는 이 집에 자기 물건이라고는 옷 몇 벌이 전부 였지만, 마치 자신의 집 같았고, 가족이 된 것 같았다. 저녁을 먹을 때면 네 명이 식탁에 앉아 함께 저녁도 먹었다. 가족이라 말 할 수는 없어도 식구가 된 것은 맞았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갈 때면 월급으로 어머니 옷과 고기를 사들고 갔다. 하늘 거리는 옷에 분칠까지 한 신희를 본 동네 사람들은 연신 신희에게 도시 사람 다 됐다며 칭찬을 마르지 않게 했다. 누군가 예전같이 짙은 농짓거리라도 할라치면 옆에서 말리는 사람도 나타났다. 

 

신희엄니도 신희가 오면 연신 웃으며 맛난 반찬을 정성스레 만들어 주었다. 둘이 앉아 신희가 사들고 온 옷을 펼쳐보고 입고 벗고 다시 입으며 딸 자식 잘 두었다고 생전 안 하던 자랑을 딸 앞에서도 막걸리를 마시러오는 남정네들 한테도 침이 마르도록 했다. 

 

읍내로 돌아가는 날이면 새벽같이 신희와 함께 일어나 버스정류장까지 마중을 가고, 버스가 눈에서 멀어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도 않았다. 신희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뿌듯하고 보람을 느꼈다. 자기가 가진 행복을 어머니와 나눌 수 있음에 버스에서 눈물이 고인 적도 있었다. 

 

말투도 제법 미경의 말투와도 비슷해져 갔다. 서울 사람인 미경은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았고 그런 말투가 너무 부럽고 가지고 싶었기에 신희는 미경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자신의 혀에 담으려 노력했다. 미경은 사람 자체가 누가봐도 곱고 부드러웠지만 신희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되고 싶은 여성상 그 이상이었다. 

 

자신이 떠 받들고 살고 시중만 들어도 모자랄 대상이, 자신을 보살펴 준다는 느낌과 생각을 들게 해 주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할 이유가 없었던 단어인 존경심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가끔 자신의 친모가 보여줬던 모성에 서글퍼지고 화도 치밀어 올랐지만 미경의 미소  앞에서는 금새 사그라들고 사라져 버렸다. 

 

어두운 지하 단칸방도 신희의 행복에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퀴퀴하고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 단칸방도 신희에게는 아늑함과 따듯함을 주는 공간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미경이 사준 하얀 잠 옷을 입고 침대에 오르면 마치 공주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몇 평 되지도 않는 작은 공간이였지만 신희의 행복을 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 난방 문제로 2층에 남는 방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말을 미경으로 부터 들었다. 온전한 자신만의 공간을 잃고 싶지 않았지만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다시 내려 오면 그만이었다. 어느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는 삶 속에 신희 얼굴에는 앳된 미소가 떠날 날이 없었다. 세상 모두가 행복해 보였고 행복해하는 모두 속에 자신도 한 몫 하는 것 같았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신희를 둘러싼 행복에서 실금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어두컴컴하지만 행복으로 가득찼던 반지하 단칸 방에 밤꽃 냄새가 뒤엉키기 전까지는.       

 

햇살은 밝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부엌을 누볐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어제 아침처럼 아침을 준비했다. 다른 풍경이라고는 어제와는 다른 건 신희의 민낯뿐이었다. 덜거덕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침상이 준비될 무렵 미경이 거실로 나왔다.

 

“잘 잤니?” 

 

“예…” 

 

신희는 미경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미경은 아직도 잠에서 헤매고 있을 아들을 깨우러 이 층으로 올라갔다. 밥그릇을 상위에 올리기 시작하자 거실을 통해 우진이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밥그릇에 밥을 푸며 낮은 목소리로 신희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평소처럼 해.” 

 

입에 들어간 밥을 씹으며 젓가락으로 김치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신희는 우진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예…”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 잔을 각 자리마다 내려놓고 미경과 아들이 내려오기를 식탁 한편에서 기다렸다. 이 층에서는 학교 가기 싫다며 종알거리는 아이를 미경이 달래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경과 아들이 자리에 앉고 나서야 신희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밥을 다 먹은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리다.” 

밥을 뜨다 만 미경과 신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진이 나가는 길을 마중했다. 걸을 때마다 신희의 사타구니 쪽이 욱신거렸다. 미경의 눈에 띄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야 했다. 걸을 때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죄책감이 되어 가슴까지 찔러왔다. 

 

“다녀오세요.” 

 

미경이 우진의 상의 어깨를 털어내며 말했다. 우진은 아무 말 없이 구두를 마저 신고는 집 밖을 나섰다. 미경이 돌아선 뒤를 신희가 쫓았다. 아들도 이미 밥을 다 먹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요 녀석 밥알 남기면 안 된다니까. 어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미경이 미소를 띠며 자리에 앉았다. 밥을 평소처럼 먹지 못 하는 신희에게 그때서야 미경이 물었다. 

 

“신희 어디 안 좋니?”

 

“아.. 아녀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밥도 잘 못 먹고 안색도 안 좋은 것 같고. 어디 아프면 있다가 원장님 병원에 같이 가자.” 

 

“아녀요. 괜찮아요.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 그럼 오늘은 먼저 내려가서 쉬렴. 내가 치울 테니까.” 

 

“아녀요. 제가 치울게요.” 

 

미경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해 밥을 넣은 입에 억지로 반찬을 욱여넣었다

 

“괜찮어라. 밥 먹고 조금 쉬면 괜찮아져라.” 

 

입꼬리를 올리며 미경의 눈을 간신히 맞추었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신희는 지하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새벽에 대야에 담아 둔 침대보를 빨기 시작했다. 쭈그려 앉자 욱신거리는 고통이 더 크게 올라왔다. 빨래를 멈출 수가 없었다. 물에 젖어 휘감겨 오는 침대보처럼 우진이 방을 나가며 한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만약 물어보거든 생리혈이라고 해.”   

 

흐느껴 울던 신희 옆에서 말없이 앉아있다 어느 정도 울음이 그치자 자리를 일어나 등 뒤로 던진 말이었다. 

 

미경을 잠들게 한 후부터 우진이 지하실로 내려오기 시작한 지도 벌써 두어 달이 지났다

 

집 안 풍경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경은 여전히 신희에게 친절했고 신희는 웃으며 미경을 대했다. 다만 바뀐 것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신희의 손에 약봉지가 들려졌다는 것이다. 

 

“잘게 빻아서 차 안에 넣도록 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가족이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물을 끓이고 차를 내 오는 일은 당연히 신희의 일이었다. 일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 약을 건네 받을 때는 받지 않겠다고 못 하겠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소용없었다. 

 

처음 찻잔에 약을 탈 때는 벌벌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었다. 하지만 이제는 약을 받는 것도 약을 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마음 한 켠 남아있던 미경에 대한 미안함도 점점 작아졌다.. 

 

약이 든 차를 마시고 나면 미경은 평소보다 이르게 침실로 향했다. 그런 날은 아들을 재우는 몫은 신희의 몫이었다. 아들을 재우고 뒷정리까지 끝내고 지하실로 내려가 먼저 하는 일은 몸을 씻는 일이었다. 

 

언젠가부터는 미경이 사준 화장품을 다시 얼굴에 바르기까지 시작했다. 

 

우진이 신희의 방을 찾는 날이 많아질수록 우진의 행동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말수는 여전히 적고 드문드문 내뱉는 말에도 온기는 없었다. 

 

우진은 신희의 몸을 천천히 그리고 여유롭게 탐닉했고 그런 우진의 몸이 뿜어내는 열기는 차갑고 습한 지하실에서 신희가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이 되었다. 

 

미경과 눈을 마주치며 죄책감에 가슴 저린 날 보다 미경의 옆에 앉아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우진을 보며 수줍게 미소 짓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죄책감과 설렘이 동시에 신희의 마음을 저리게 했다. 

 

우진이 약을 건네는 날이면 기계처럼 약을 빻고 차를 최대한 진하게 우려냈다. 우진이 약을 받은 날을 기억해 자신이 무엇을 입었는지 화장을 어떻게 했는지도 잊지 않으려 했다. 

 

그런 날은 생기발랄하게 꾸민 어린 가정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신희의 분냄새가 집안 곳곳에 퍼지는 날들이 자주 반복되어가고 있었다.   

 

저녁이 지나고 나면 미경은 깊은 잠에 빠졌다. 가루로 된 수면제는 신희와 우진에게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었다. 덤덤하고 말 수 없던 우진도 신희의 늘어가는 애교와 웃음에 밝게 웃는 날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우진이 신희의 방으로 내려갔다. 차츰차츰 미경과 아들이 없는 거실은 두 사람만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마치 집 안에는 두 사람 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장에 나가 미경이 옷을 사주는 날이면 신희는 옷도 직접 골랐다. 두 어달에 한 번씩 내려갈 때마다 사던 엄마의 선물보다 자신이 쓰는 화장품을 더 많이 사게 됐다. 어느 날부터는 엄마가 쓰던 사투리보다는 미경이 쓰는 서울말을 쓰며 배워갔다. 

 

미경이 쓰는 말을 발음 하나라도 배우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신희의 달라져 가는 모습에는 더 이상 촌스러움이 묻어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집에서 일을 봐주는 사람이 아닌 대학에 입학한 소녀로 보였다. 

 

“잘 다녀오세요 사모님.” 

 

“응 그래 신희야. 나 없는 동안 선생님 식사 잘 챙겨드리고. 가 있는 동안 아들 방 쓰고 있어..”

 

“네 그렇게 할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다녀와서 2층에 짐방 정리해서 네 방으로 만들자.” 

 

“감사해요. 다녀 오실 동안 제가 잘 하고 있을게요?

 

“그래. 만약 어려운 거나 모르는 일 생기면 알려준 번호로 전화하고.” 

 

미경은 짐을 챙겨 아들의 손을 잡고 집 문을 나섰다. 미경의 뒤를 쫓는 신희는 나오는 미소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그럼 다녀올게.” 미경과 아들이 대문 밖을 나섰다. 

 

“철컹.” 

 

대문이 닫히면 자동으로 잠겼다. 신희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미경이 서울 집에 2주 동안 올라간다는 말을 들은 뒤로 설레오던 마음이 미소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이 신희에게 온 것이다. 살면서 이렇게 어느 한 날을 기다려 왔던 적이 없던 신희였다. 

 

신희는 붕 뜬 마음으로 집 안으로 돌아가 집안 곳곳을 청소 했다. 가장 먼저 청소를 시작한 곳은 안 방이었다. 침대보를 걷어 내고 새로운 침대보로 갈았다. 안 방의 먼지는 한 톨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이 공을 들여 청소하고 또 청소했다. 

 

집 안 청소가 끝나자 어느 덧 저녁을 준비 할 시간이 다가왔다. 신희는 자신의 방으로 내려가 몸을 닦았다. 다시 화장을 하고 평소 자신이 아껴 입지 않던 옷을 꺼내 입었다. 

 

빚으로 여기저기 머리카락을 누르고 띄우며 찌르며 풍성하게 만들었다. 입술에 붉은색 루즈를 진하게 칠하고 화장을 마무리 했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둘러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입은 옷을 눈과 거울로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주방으로 돌아가 미리 재워 둔 고기를 볶았다. 밥을 얹히고 밑반찬들을 냉장고에 꺼내 정성스레 접시에 옮겨 담았다. 고기가 너무 조리지 않게 불을 적당하게 줄였다. 

 

우진이 돌아오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신희에게는 그리 짧게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거울을 보고 또 보며 잘 못 된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마음은 나비가 한 마리 들은 것 마냥 살랑사랑 거렷지만 몸은 안절부절 못하고 초조함을 누르지 못 했다. 

 

“띵동” 

 

평소보다 빠른 시간에 초인종이 울렸다. 깜짝 놀란 신희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화장한 얼굴임에도 티가 날 정도로 홍조가 꽃을 피었다. 신희는 한 달음에 달려 대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서 있어야 할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던 고민이 불현듯 신희의 몸을 더 안절부절하게 만들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