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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역사기록 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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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궤〉에 기록된 주요 행사는 왕실의 혼인을 비롯하여 왕과 왕세자의 책봉 , 왕실의 장례, 제사, 궁중 잔치, 활쏘기, 태(胎)의 봉안, 국왕의 행차, 궁궐 건축, 친농(親農)⋅친 잠(親蠶) 행사, 사신의 영접 등 국가나 왕실 행사 전반에 관한 것으로 행사의 과정을 날짜에 따라 기록한 각종 공문서를 비롯하여 업무의 분담, 담당자의 명단, 동원된 인원, 소요된 물품, 경비의 지출, 유공자 포상 등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행사의 가장 중요한 행렬은 반차도(班次圖)를 통해 표현했다.[1]

〈조선왕조의궤〉의 체제는 의례의 전 일정을 일자별로 정리한 시일(時日), 의례의 주요장면이나 주요도구의 그림을 실은 도식(圖式)·도설(圖說), 업무시 오고간 문서들을 기록한 교지(敎旨)·상주문(上奏文), 인건비 등의 각종 비용을 적은 재용(財用), 물품을 제조한 각종 기술자의 명단인 공장(工匠), 의례 집행시 유공자 포상 내용을 적은 상전(賞典) 등을 담고 있다.[1]

〈조선왕조의궤〉는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조선만의 독특한 전통으로서 예법을 중시하고 기록을 철저히 보존하려는 조선시대의 우수한 기록문화 중 하나로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1]

 

평창에 의궤박물관이 있다.  

 

의궤는 조선왕조 의식의 궤범, 의식의 모범이다. 조선왕조에서 어떤 행사나 의식을 치룰때면 화가들과 행정가들이 꼼꼼히 하나하나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긴 기록서다. 나라 전체가 예를 따지던 나라이다보니 왕실이 행하는 예는  규모가 어마어마 했다. 의식을 치룬 것을 기록해 후대에 남겨 훗날에 치루어진 의식을 격식과 예에 맞게 행할  있도록 기록을  놓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도  기록의 양과 정확성에서 세계에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들지만 의궤의 경우는 비슷한 전례가 전혀 없다.  왕가의 행사와 의식을 그림과 글로 남겨 후대가 참고   있게 만든 왕조나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를 기록했던 나라인 만큼 의궤 또한  꼼꼼함이 다른 기록물과의 비교가 무색할 정도다. 

 

태조, 조선의 시작점부터 의궤가 기록이 되었으나 초기 조선의 의궤는 소실되어 찾기 힘들고 가장 오래  의궤는 의인왕후의 장례기록을 남긴 1601년 의궤가 가장 오래된 의궤로 남아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침입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外奎章閣)에서 300여 책의 문서를 약탈하였다. 이들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2011년에 대한민국으로 5년제 영구 임대되었다. 또한 2010년 공개된 자료[3]에 따르면 일본 궁내청이 소장한 조선왕조 의궤가 총 81종 167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새로 확인된 의궤는 《진봉황귀비의궤》(進封皇貴妃儀軌), 《책봉의궤》(冊封儀軌) 2종, 《빈전혼전도감도청의궤》(殯殿魂殿都監都廳儀軌), 《화성성역의궤》 등 5종이다.

 

박병선(朴炳善, 1923년 3월 25일 ~ 2011년 1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겸 저술가이다.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임을 밝혀 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해 내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시킨 1등 공신이다.[1][2]

 

박병선(朴炳善, 1923년 3월 25일 ~ 2011년 1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겸 저술가이다.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임을 밝혀 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해 내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시킨 1등 공신이다.[1][2]

 

1955년 대한민국 여성으로서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서른 세 살의 나이에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를 꼭 찾아보라는 대학교 시절 스승 이병도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1][6]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존재 여부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 박병선은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 고서점 등을 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그러던 중 한문으로 된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는데,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에서는 직지심체요절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박병선에게 입을 다물라고 했다. 타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을 외면하는 프랑스의 태도에 박병선은 자존심이 상했고, 혼자 직지심체요절의 가치를 밝혀내기 위한 고증 작업을 시작해 마침내 그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책의 역사 종합전람회’에 직지심체요절을 출품했고 이를 통해 직지심체요절이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성경책보다 무려 78년이 앞선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임을 전 세계에 알렸다.[6]

 

1975년에는 외규장각 의궤의 행적을 밝혀 내었는데, 20년 동안 찾아 헤매던 이 의궤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돼 있었다. 이 사실을 한국에 알리자 프랑스는 외규장각 의궤의 존재를 한국에 알렸다는 이유로 그를 권고 사직시키고 ‘한국의 스파이’라는 오명을 씌우기까지 했다. 박병선의 적극적인 노력 끝에 2011년 5월 27일 297권의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에 대한민국 땅으로 돌아왔다.[6][7]

 

박병선은 벨기에 루뱅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한 후 파리 제7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였고 1967년부터 13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했다.[8] 직지심체요절의 존재를 처음 발견하여 1972년에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렸고, 1975년에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해 대한민국 내 '외규장각 도서 반환 운동'에 불을 지폈다.[9]

박병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던 청사를 찾아내기도 했고, 파리 근교에서 살면서 한국 관련 각종 고서 연구와 프랑스에서 본 한국의 3·1운동 등에 관한 독립운동사를 정리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인쇄사’(프랑스어·스페인어·영어·한국어)가 있고, ‘한국의 무속사’, ‘한국의 역사’ 등을 프랑스어로 펴냈다.[1]

 

유일본이자 가장 오래된 외규장각 의궤로는 『풍장도감의궤』(1630년(인조8) 분산용, 유일본) 이다. 인목대비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서 인경궁에서 열린 잔치 행사를 기록한 분산용 의궤이다. 당시 후금과의 관계가 긴박하고 흉년이 들어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인조는 자신의 반정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준 대비에 대한 고마움으로 풍정(잔치)을 올렸다. 한 책만 남아있는 유일본으로 외규장각 의궤 중에서 그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외규장각 의궤(外奎章閣儀軌))]

 

난 2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를 담당하는 학예사 이메일로 약정서 한 통이 왔다. 발신자는 프랑스국립도서관. 외규장각 의궤 귀환 10년을 맞아 대여 합의를 갱신하는 내용인데, 이전에 없던 조항이 붙어 있었다. “앞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닌 제3자가 상업적 목적으로 의궤 사진을 이용하려면 우리에게 돈을 내야 한다”는 것. 당황한 담당자는 “우리 박물관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데다 모든 소장품을 누구나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게 개방하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답신을 보냈다.

10년 전인 2011년 4월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儀軌·조선 왕실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가 돌아왔다. ‘145년 만의 귀향'이라고 떠들썩했다. 하지만 완전한 반환이 아니었다. 5년마다 대여를 갱신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고, 소유권은 지금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있다.

 

 

 

[단독] 외규장각 의궤, 佛서 날아온 이메일 한 통

 

“사진 사용료 내라” 추가조항 붙어
항의하자 한달만에 “없던 일로”

 

 

허윤희 기자

입력 2021.04.22 05:00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 전시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이 프랑스에서 돌아온 조선왕실 의궤들을 살펴보고 있다. /조선일보 DB

지난 2016년 처음으로 ‘대여 합의’가 갱신됐고 또다시 5년이 흘렀다. 올해 귀환 10년을 맞아 지난 2월 한국과 프랑스 외교부는 ‘5년 동안 대여를 연장한다’는 합의문을 교환했다. 이후 프랑스국립도서관과 소장 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 사이의 갱신 절차가 진행 중이다. 윤성용 학예연구실장은 “‘사진 사용료 조항은 합의할 수 없다'는 답신을 보낸 지 한달 만에 프랑스도서관측에서 ‘동의한다’는 회신이 왔다”며 “향후 조항을 꼼꼼히 검토하며 몇 차례 더 이메일을 주고받아야 갱신 절차가 완료될 것”이라고 했다.

학계에선 “지금이라도 외규장각 의궤의 소유권을 온전히 돌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반환이 아닌 대여 형식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전시와 활용에도 제약이 많다는 것.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보·보물이 될 수도 없다. 지난 2016년 국내에 있는 조선왕실 의궤가 일괄 보물로 지정됐지만 외규장각 의궤는 빠졌다. 프랑스국립도서관과 협의하지 않으면 국립중앙박물관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지난 2019년 동유럽권 최초로 폴란드에서 열린 한국 문화재 특별전에도 의궤는 프랑스 측과 협의를 거친 후에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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