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사랑에 빠진 공주

윤영은 투멘왕자의 얼굴을 보았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윤영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아가씨.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아니요. 저는 제 마음을 정했어요.” 윤영이 등을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나와의 혼인으로 당신의 조국을 구할 수도 있지 않소.”

“아니요. 저는 조국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왕자님을 따라 울루제국으로 간다면 제 마음이 병들고 말거에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윤영 아가씨…제발! 제발! 저와 함께 제국으로 갑시다. 저의 아버지, 황제폐하를 설득해 보 보이겠소. 당신의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오.”

“아니에요. 제가 비록 여자의 몸이긴 하나 가야 한다면 전장터까지 갈 생각입니다. 마음은 이미 굳혔어요.”

윤영이 다시 몸을 돌려 투멘을 바라보았다. 투멘의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은 너무 감사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이번 침략이 제 조국을 역사 속으로 밀어낸다면 저는 조국과 함께 역사가 되겠어요”

윤영 앞에 무릎 꿇은 투멘이 윤영의 손을 잡아 자신의 볼에 대었다. 투멘의 눈물이 윤영의 손을 타고 흘렀다.

“제발…”

윤영의 얼굴에도 슬픔이 차 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투멘을 따라 울루제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울루제국의 셋째 왕자이지만 황태자가 될 서열로 보자면 둘째 왕자 다음이었다. 큰 키에 진한 갈색눈, 짙은 붉은색 머리를 한 투멘은 전형적인 울루의 사람이었다.

윤영은 투멘의 손을 꽉 쥐었다. 말로 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아래 입술을 깨물었던 윤영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돌아가세요. 저는 오라버니의 장례를 치루어야 합니다.”

윤영의 오라비 윤서는 시루스 제국의 침략전쟁에 중앙군으로 참전하여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 소식은 이미 일주일전에 당도했으나 시신은 내일 즘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투멘 왕자님. 당신의 넓은 성정을 제가 받지 못 해 죄송합니다. 마음만 제가 간직할터이니 부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셔요.”

“윤영 아가씨… 당신의 간곡한 거절을 마음에 품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으나 단호한 그대의 목소리를 내가 거부한다면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 것 같소.”

“감사합니다. 왕자님.”

윤영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부디 당신의 나라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바라오. 진심으로 말이오. 내 그대를 기다리고 있겠소.”

투멘왕자 또한 윤영에게 예를 갖추고 시녀의 인도를 받아 윤영의 방에서 나갔다.

윤영은 의자에 앉았다.

근심과 걱정 그리고 안타까움이 섞인 우수에 찬 얼굴이었다.

투멘왕자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큰오라비 윤서의 죽음이 윤영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몸이 쇠약해진 아버지에게는 아직 큰아들의 전사를 알리지 못 했다. 노년으로 몸이 많이 쇠약해진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차마 알릴 수가 없었다.

윤영은 위로 두 오라비가 있었다. 큰 오라비 윤서는 이번 침략전쟁에서 국왕군의 장교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고 둘 째 오라비는 문과에 급제하여 궁궐에서 관리로 일하고 있었다.

대대로 구선지역에 정착하여 세를 쌓아온 가문으로 윤영의 가문은 사비국에서 알아주는 대부호이자 명망있는 가문이었다.

윤영의 아버지는 이런 가문의 독자였기에 빨리 혼인하여 대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혼기를 훨씬 넘긴 나이까지 혼인은 생각지도 않고 있다가 윤영의 어머니를 운명같이 만나 혼인을 치룬 것이다. 둘의 나이차가 많이 나는 편이었지만 두 사람의 금술은 사비국 전체에도 소문이 날 정도였다.

보통 윤영의 아버지와 같은 권력가들은 후처를 두어 최대한 많은 후사를 낳는게 흔하였으나 윤영의 아버지 한석은 윤영의 어머니 서단만이 전부였다.

윤영까지 세 명의 아이를 순산한 서단이였지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윤영이 다섯살 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뒤로도 한석은 새로 처를 들이지 않고 서단을 그리워 하며 홀로 삶을 살아왔다.

노년에 병환까지 얻은 아버지 한석에게 차마 윤영은 큰오라비의 죽음을 알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큰오라버니를 보낼 준비는 이미 마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