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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and Dating/연애에 관한 고찰

자존감과 자존심은 높아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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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결여 된 자존심, 자존심이 없는 자존감. 


자존감에 대해 연구를 해 본 사람이 아니니 지금부터 시작할 비전문가가 쓴 자존감과 자존심에 대한 글은 그저 한 개인의 생각과 의견으로 받아 들이도록 하자. 자존감과 자존심을 한자로 풀어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자존까지는 똑같다. 자존은 스스로를 높이다라는 뜻이며 자존심의 심은 마음 심이고 자존감의 감은 느낄 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감을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결국, 이 두가지의 말이 갖는 중요 공통점은 스스로를 높여 여기는 마음이다.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을 스스로 자존심과 자존감 높은 사람으로 여기면 자긍심이 생겨 자신의 행동거지를 옳바르게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자존심,자존감,자긍심 등이 일정이상, 비정상정으로 강해지고 커진다면 오만, 독선, 이기, 광기에 사로 잡힐 수도 있으니 이 점은 유의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이 오래도록 읽히는 이유가 있다. 


그런 말이 있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 할 수 없다고. 자신의 중요함을 모르는 사람이 타인의 중요함을 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을 더 크게 사랑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해 본다면 이 또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하지만 어느쪽이 됐던, 자신을 사랑하는 것부터 타인을 사랑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한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인간이라는 그 자체를 사랑하고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되니 말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가, 실수투성이에, 모순적이고, 자기만 아는 이 이기적인 종자들을 사랑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인간의 범주 안에 나도 포함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충분히 이기적이고, 지독할 정도로 모순적인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가 안되는 그 인간들과 똑같이 분류되는 것 중 하나가 나라는건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런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 할 수 있다면 자존감과 자존심의 기본을 갖춘게 아닐까 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을 해보는게 어떨까 한다. 자존감을 높이고 싶다면 말이다. 그것부터 인지하고 고쳐나가는건 어떨까. 자존감이나 자존심은 타인에 의해 높여 질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생각없이는 그 한계가 있을 것이고, 그 한계는 아마 바다앞의 모래성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을까 한다.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객관적인 눈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실수에 손가락질하고 타인의 악덕에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인간이 하는 보통의 일 중 하나지만, 그 손가락과 시선을 가끔은 자신에게 돌려 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자신의 문제는 무엇인지, 자신의 행동은 어떤지, 자신의 어투와 본성은 어떤지 제 3자의 눈으로, 최대한의 객관으로 자신을 바라보려는 훈련이 필요하다. 자신을 그저 주체로서, 자신의 몸과 생각의 주인으로서만 바라보면 놓치고 지나가거나 한 없이 관대해져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나 행동을 판단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3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 보도록 해 보자. 거기서부터 자존심과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비교는 좋지 않다. 비교만큼 자존심에 상처를 주고 자존감을 깍는 행동도 없다. 인간은 비교가 불가능한 존재다. 한 개인이 비교불가능한, 고유하고 절대적인 하나의 객체다. 그러므로 사실 어떤 인생이 더욱 낫다 라고 판단할 기준도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 생명 자체가 고귀하게 여겨져야 함이 사실이라면 살아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인간 그자체와 그들의 삶은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은 사회적동물이고, 소위 말하는 이 사회적동물은 끊임없이 다른 사회적동물과 자신을 비교하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해져 있다. 하지만 비교자체를 너무 편협하고 좁은 시각으로 바라 볼 일만은 아니다. 마더 테레사를 보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 할 수 있고, 달라이 라마의 글귀를 읽으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도 있다. 마크 주커버그를 보며 이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며 질문을 던 질 수도 있다. 아니면 적어도 히틀러 같은 사람은 되지 않았구나 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계기를 가질 수도 있다. 다른 타인의 삶과 자신을 비교하며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마련할 수도 있고 도전을 위한 계기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삶을 보며 그저 자신의 존재를 한 없이 높게 평가하거나 낮게 평가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의 다른 한 개인으로서 살아가면 된다. 비교를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이겠으나, 비교를 멈출 수 없다면 비교를 계속해서 좋다. 하지만 비교 또한 건설적으로 하는건 어떨까 한다. 


자신의 행동과 마음 그리고 생각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우선 생각과 마음을 비교해 보자. 자신이 하는 생각이 감성에서 오는 것인지 이성에서 오는 것인지, 합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비이성적인 행동인지 구분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비이성적이라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길거리의 노숙자를 도와주는 것을 이성적이냐고 묻는다면 극단적인 이성주의자는 감성에 치우친 위선이나 사회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행동이라 여길 수 있다. 여튼, 자신의 마음과 생각, 이성과 감성을 비교하는 훈련을 해 보자.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 할 것인가, 감성적으로 이 문제를 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는 나 스스로는 어떤 문제나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대처 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해 보자.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도록 하자.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결정을 내렸다면 그 결정과 자신의 행동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행복하기로 한 결정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 행동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 보도록 하자. 그 행동이 자신의 생각, 결정과 일치하는가, 그 행동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가를 들여다 보도록 하자. 이런 훈련을 할 때는 타인을 위한 생각은 우선 접어 두자.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동안만큼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타인의 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또한 훈련의 일부분이라고 생각을 하자.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며 타인을 만족시키려는 삶 보다는 자신을 만족시키는 삶을 통해 타인에게 이로움을 주는게 본인에게 이롭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보면 대가를 요구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타인에게 희생한다면 대가를 요구 할 것이 없다. 자신을 위해 한 타인을 위한 희생이니 말이다. 타인의 눈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을 찾도록 하자. 


타인을 행복하게 하려함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타인을 만족시킴으로 자신의 중요여부를 확인 받으려는 것인지 구분 할 필요가 있다. 자존심은 스스로 지키고 자존감은 스스로 높이는 수 밖에 없다. 타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려는 의지는 자존심이 될 것이고, 타인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없이 본인을 스스로 사랑하는 건 자존감이 될 것이다. 타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며 스스로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타인과 함께 할 줄 알면서도 스스로도 행복 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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